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담 Apr 03. 2024

못생긴 얼굴에서 출발하다

차성환 시인의 못

 


     차성환

 

 

  검은 옷을 입은 못이 옷을 걸기 위해 콘크리트 벽면에 몸을 박았다면 못은 이미 박혀 있는데 못을 때리는 망치 소리의 한 점으로 수렴해 들어간 방은 못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한번 박은 못은 영원한 못이 되어 더 이상 무를 수 없는 죽은 점이 되고 모든 옷이 못으로 달려 들어가 평생에 한 번쯤은 몸을 의탁해 잠들 수 있는 자리를 펼쳐 보이고 못이 박힌 소리는 잊히지 않고 못과 함께 단단히 쇠못에 붙들려 숭고하게 숭고한 못으로 차갑게 그대로 있고 못은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벽이 무너질 때까지 방이 사라질 때까지 집이 멸망할 때까지 못은 세계를 열심히 박아 넣어 우주보다 큰 구멍을 제 안에 품고 마치 구멍이 못을 꿈꾸었던 것처럼 못은 구멍에서 자라난 못이고 점이고 흰 벽에 검은 못은 절대 못갖춘마디로 어떤 흠집과 결점이 되어 못이 없는 벽면의 깨끗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렇다고 못 생긴 벽면의 아름다움 또한 몹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순수한 점을 불러일으켜 검은 못을 이빨로 뽑아내거나 물렁한 머리를 박아 넣는 식으로 나를 걸어 보기도 하는 검은 밤의 못은 숨 막히는 저수지의 깊은 못처럼 끝없이 육박해 들어가는 소리의 한 점





[출처] 【웹진 시인광장 국내 시선詩選ㅣ현대시】못 - 차성환 □ 웹진 시인광장【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7년 3월 17일 e-메일 |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차성환



내가 차성환 시인을 발견하게 된 것은 '못생겼다'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그리는 낙서들은 왜 하나 같이 못생겼을까 하다가 웹진 시인광장에서 못생겼다와 관련된 시가 있지 않을까 하고 검색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맨 위에 '못'이라는 시를 발견했고, 내가 생각했던 '못생겼다'의 '못'은 형태가 이루어지지 않음인데 여기서의 '못'은 뾰족한 금속을 말한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동음이의어란 점에서 묘하게 끌리게 되었다. 그래서 시를 퍼와서 블로그에 붙여서 찬찬히 읽으니까 너무 감동적인 것이었다. 이미지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자연스럽게 치환되는 것에 매료되었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그 여운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우연히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다는 것에 말이다.


그리고 위에는 원문을 복사한 것이고, 아래는 블로그에서 내가 글자 크기를 키워서 처음 있던 시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못이란 시의 형태는 작은 정사각형 아래 꼬리가 붙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몸집이 비대한 작은따옴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확실히 시는 글자 맛도 있지만 시인이 어떻게 시를 구축시켰는지 이미지화된 것도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성환 시인의 시는 감각적이면서도 서사가 있는 그런 시 같다.



검은 옷을 입은 못이 옷을 걸기 위해 콘크리트 벽면에 몸을 박았다면


왜 굳이 못이 검은 옷을 입었을까. 그리고 그 못은 자기의 역할인 옷을 걸기 위해 콘크리트 벽면에 몸을 박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읽고 떠오른 것은 내 동생들이다. 걔들은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에 검은색 잠바에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잘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나 역시 재킷은 주로 검은색 롱코트를 익숙하게 집어 입는다. 검은색이란 아무렇게 입고 다녀도 괜찮다는 의미도 되고 또 아무런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못'을 어떤 화자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콘크리트 벽면에 옷을 걸기 위한 못이 자아라고 인식했다.


못은 이미 박혀 있는데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게 '못은 이미 박혀 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왜 이미 못이 박혀 있다는 것일까. 다른 못이 존재한단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래봤자 못이라면 그 못이 그 못일 것이다. 새로운 못이라기 보단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가 차지한 자리를 내가 차지하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더없이 혼란스럽고 갑갑한 상황일 것 같다.


못을 때리는 망치 소리의 한 점으로 수렴해 들어간 방은 못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못을 때리는 망치 소리의 한 점으로 수렴해 들어간' 방이라니 과연 어떤 방일까. 못을 벽면에 고정시킬 때는 필연적으로 망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못과 망치 소리는 한 점으로 수렴해 들어가기 위해 같이 애쓰게 된다. 방은 그런 상황을 품고 있는 한 공간 같다. 그런데 역으로 그 방이 다시 처음의 못으로 돌아가 못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시에서 등장한 시어가 '못' '콘크리트' '망치' '검은 옷' 이렇게 등장해서 방 자체도 햇빛이 잘 들어오는 화사한 방이 아니라 곰팡이 냄새가 피어나는 지하 단칸방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 방 자체도 위에서 나온 검은 옷처럼 못에 걸려있기 딱 좋게 축 늘어진 외투가 아닐까 자연스럽게 생각이 든다.

 


한번 박은 못은 영원한 못이 되어 더 이상 무를 수 없는 죽은 점이 되고


내가 이 시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한번 박은 못은 영원한 못이 되어 더 이상 무를 수 없는 죽은 점이 되고'란 말은 되게 멋지다. 못은 쓰임을 하기 전에는 진짜 못이 아니다가 벽면에 박히는 순간 그곳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영원히 죽은 점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표현은 '못'이 지니고 있던 성질을 시인이 잘 이해하고 감각적으로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취업한 청춘이 회사에서 죽은 못처럼 일하는 모습이 쉽게 떠올랐다. 물론 현실은 영원한 것은 없고 또 죽은 점이 되기 전에 쏠랑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직장 내에서 버티다 죽음으로 돌아오는 청년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모든 옷이 못으로 달려 들어가 평생에 한 번쯤은 몸을 의탁해 잠들 수 있는 자리를 펼쳐 보이고


이 구절에서는 못이 갖고 있는 무게감을 잘 표현한 것 같다. 하나의 못에 모든 옷들이 우수수 달려든다면 얼마나 버거울까. '평생에 한 번쯤은 몸을 의탁해 잠들 수 있는 자리를 펼쳐 보인다'는 것은 못이 해낸 어떤 성과물 또는 역량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스스로 해냈다는 기쁨으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채감처럼 묵직하게 다가오기만 한다. 가령 첫째 자식에게 달려있는 부양가족들이 주는 무게감처럼 말이다.


못이 박힌 소리는 잊히지 않고

못과 함께 단단히 쇠못에 붙들려 숭고하게 숭고한 못으로 차갑게 그대로 있고


못이 박힌 소리는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어쩌면 못은 자기의 역할 대로 벽면에 망치로 자연스럽게 박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망치질 자체가 주는 고통과 공포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못이 박힌 소리는 잊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못과 함께 단단히 쇠못에 붙들려 숭고하게 숭고한 못으로 차갑게 그대로 있다고 한다. 내가 여기서 시선이 간 단어는 '숭고'이다. 과거 철학과 미학 수업 때 내가 발표한 챕터가 바로 '숭고'였다. 사전에서 보면 '뜻이 높고 고상하다'라고 요약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숭고는 그것보다 더 복잡한 단어였던 것 같다. 나무위키에서 보면 숭고는 '수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무위키 숭고 https://namu.wiki/w/%EC%88%AD%EA%B3%A0 )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숭고와 비슷한 설명을 네이버 블로그에서 찾았다.


숭고는 흔히 쾌와 불쾌가 혼합된 모순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우리가 무한히 큰 어떤 것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알지 못해 좌절을 느끼는 불쾌감과, 그것을 마침내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쾌감이 바로 그것이다.

      

[출처] 색면추상_숭고미학_진중권|작성자 choicreation


 위의 말처럼 '무한히 큰 어떤 것과 마주쳤을 때의 불쾌감과 좌절'이다. 숭고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령 전쟁에서 다수를 위해 희생된 소수를 보면 숭고미를 느낀다. 어떻게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지, 혹은 저런 선택은 진짜 아름답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숭고가 진짜 능동적인 선택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고뇌처럼 한 개인적인 인간으로 보았을 때 그 희생은 수동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숭고미란 단어를 보면 뭔가 아련하면서도 아름답지만 어쩐지 피칠갑을 한 장미처럼 섬뜩하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숭고하다는 표현 뒤에 '차갑게 그대로'란 말을 적지 않았을까. 그리고 앞에서 '숭고하게 숭고한 못으로'라는 말에서 숭고하단 말을 두 번 표현한 것은 강조이며 반어법처럼 느껴지게 한다. 여기서 숭고하게 숭고한 못으로 그렇게 죽었다는 말을 차갑게 그대로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못은 사라지지 않는 흔적으로 벽이 무너질 때까지 방이 사라질 때까지 집이 멸망할 때까지


그리고 이 구절에서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못은 벽이 무너질 때까지 방이 사라질 때까지 집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리지 않는 흔적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다고 한다. 여기서 시인은 벽, 방, 집 순으로 점층적으로 하나씩 사라져도 못은 그 자리에 남아있게 함으로써 더 대비되고 더 비극적으로 표현했다. 못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자리에 못 박혀 주변 것들이 떠나가는 것을 봐야 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싶었다.


못은 세계를 열심히 박아 넣어 우주보다 큰 구멍을 제 안에 품고 마치 구멍이 못을 꿈꾸었던 것처럼


그래서 여기서는 '우주보다 큰 구멍을 제 안에 품고'라고 표현했나 보다. 스스로 낸 상처인지 망치가 낸 상처인지 조금 헷갈리지만 그래도 못 자체로 품고 있는 큰 구멍이 블랙홀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위치가 반전된다. 원래 못이 먼저이고 후에 구멍이 생긴 것인데, 마치 큰 구멍이 못을 꿈꾸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못이 '세계를 열심히 박아 넣어'라는 표현처럼 큰 구멍은 태어났고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오래된 거목에는 어떤 사념 또는 어떤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인간은 믿는다.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못은 구멍에서 자라난 못이고 점이고


그런 의미에서 못은 구멍에서 자란 못이고 점이라고 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처럼 못이 먼저인지 구멍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서 되게 신기한 점은 한 지점에 박힌 못이 점점 자라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한 개의 점이 될 수 있는 것도 모두 구멍 덕이다. 못과 구멍은 서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어떤 공생의 관계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나와 그림자처럼 한 몸이지만 성격이 다른 어떤 자아이지 않을까.


흰 벽에 검은 못은 절대 못갖춘마디로 어떤 흠집과 결점이 되어 못이 없는 벽면의 깨끗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렇게 벽에는 못이 박혔고 그 자리에는 구멍이 생겼다. 흰 벽에 검은 못은 조화롭지 못하여 '절대 못갖춘마디'라고 말하고 있다. 못갖춘마디는 모든 박자가 갖춰지지 않고 앞부분이 비어 여리게 시작하는 마디라고 한다. 여기서 못은 편의를 위해 박았다지만 미적으로 흠집이며 결점이라 티 없이 깨끗한 흰 벽면을 가끔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런 상상을 하고는 한다. '만약 내게 그런 상처가 없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인간으로 자랐을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어쩌다 내게 되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 것처럼 저 못도 자신이 박히기 전의 완전하고 완벽했던 흰 벽의 모습을 떠올리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못 생긴 벽면의 아름다움 또한 몹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떤 순수한 점을 불러일으켜


그렇지만 '못 생긴 벽면의 아름다움' 또한 존재하며 이것을 시인은 몹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커다랗고 하얀 벽면에 점 하나 딱 박혀 있다면 그것은 부조화일지 몰라도 어떻게 보면 강렬하고 순수한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을 보며 내가 처음 '못생겼다'란 단어와 맞물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반듯하고 정형화된 이미지만 있을 수 없다. 울퉁불퉁하고 큰 구멍이 난듯한 내 낙서도 아주 몹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내게 조용하고 잔잔하게 위로를 건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은 못을 이빨로 뽑아내거나 물렁한 머리를 박아 넣는 식으로 나를 걸어 보기도 하는


앞에서는 못을 인정하는 분위기라면 여기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이 보인다. 검은 못은 툭 튀는 존재이니까 없애거나 가리려고 '이빨로 뽑아내거나 물렁한 머리를 박아 넣는 식으로 나를 걸어 보기도 하는'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못을 이빨로 뽑으려고 하거나, 물렁한 머리를 박아 넣어 나를 걸어 본다니 얼마나 폭력적이며 무서운 일일까 싶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그만큼 절실하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시를 쭉 읽어 보니까 '못'으로 존재하는 자아와 '못'을 바라보는 자아가 둘로 존재하는 것 같다. 가령 내가 존재하고 나를 인식하는 메타인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못이란 시에서 나오는 자아들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달빛처럼 느껴진다.


검은 밤의 못은 숨 막히는 저수지의 깊은 못처럼 끝없이 육박해 들어가는 소리의 한 점


드디어 마지막 구절에 다다랐다. 내가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꽤 큰 충격이었다. '검은 밤의 못'은 '숨 막히는 저수지의 깊은 못처럼 끝없이 육박해 들어가는 소리의 한 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못은 검은 옷을 처음 입고 있다가 이제는 검은 밤을 입고 있게 되었다. 이 역시 공간의 확장이다. 그리고 그런 못이 숨 막히는 저수지의 깊은 못처럼 한 점으로 육박해 들어간다고 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저수지의 연'못'이 등장해서 동음이의어로 되게 재미있었다. 내가 처음 생각한 '못'은 동작이 이루어지지 않음이고, 이 시에서의 '못'은 뾰족한 금속이며, 마지막 행에 나온 '못'은 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이다.


나는 처음 이 구절을 읽고 뾰족한 못이 깊은 못으로 소리 한 점이 되어 빠져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현실에 지친 한 청년이 자신의 삶을 비관해서 깊은 못으로 스스로 빠져들어가는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또 지금 다시 읽어보니까 '숨 막히는 저수지의 깊은 못처럼'은 소리의 한 점을 더 강렬하게 보이기 위한 수사구처럼 보인다. '끝없이 육박해 들어가는'이란 말은 좁은 공간에 바짝 가까이 붙어 몸을 욱여넣는 이미지가 상상된다. 그리고 마지막 '소리 한 점'은 자신의 형체를 잃고 무형의 존재로 세상을 떠도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검은 밤의 못은 숨이 막히며 어딘가 좁은 곳에 갇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읽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차성환 시인의 '못'이란 시는 우울하고 또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시가 '자신의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로 읽힌다. 각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시를 해석하는데 아주 미칠 듯이 어렵지 않았다. 잔잔하게 어려워서 이건 뭘까 이건 어떤 의미일까 고민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종종 시의 느낀 점을 쓰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 정말 맞을까 아니면 내가 오독을 열심히 하는 중은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하는 정답의 길에서 비껴나간 글을 이렇게 열심히 계속 써도 되는 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러면서도 도토리를 한 알씩 주워 먹는 다람쥐 마냥 시인이 떨어뜨린 구절이 나에게 배부른 기쁨을 준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시는 활자보다 작은 영상 또는 작은 동화책이 되었다.


나는 종종 거울을 보며 '어쩌면 이렇게 못 생겼을까' 감탄하기도 한다. 그럼과 동시에 '어쩌면 이렇게 평범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안도를 하기도 한다. 아마 저 못도 자신을 비관하다가도 자신을 연민하고 긍정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소리 한 점'은 하나로 모아져 가는 긍정적인 결과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앞에 모든 말들이 불안정해도 결국에는 하나의 점으로 모아서 큰 우주 같은 구멍을 완성해 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차성환 시인의 프로필을 찾아보니까 1978년 서울에 태어났고 멜랑콜리와 애도 사이에서 시를 쓰고 식민지 문학을 연구한다고 하였다. 이 시에서도 멜랑콜리의 느낌이 물씬 풍겨서 더욱 내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대학생 때 시를 공부하고 쓰면서 되게 암울하고 힘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내게 '시'라는 친구가 생겨서 더없이 기쁜 일인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누렁이가 떠나간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