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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Apr 11. 2024

무릎의 문양, 김경주

초등학생 때 스티커로 만든 손목시계

무릎의 무양이란 제목에 꽂혀 이 시를 타이핑하기로 마음먹은 지 벌써 1-2주는 지난 것 같다. 친구에게 운동 언제 하냐는 질문에 당뇨병 얻기 전에 한다니까 거하게 욕먹었다. 보통 구체적으로 일주일 뒤 혹은 한 달 뒤를 떠올리지만 나는 그저 미루고 싶을 때까지 미루자는 마음으로 답했다. 일단 제목이 무릎의 문양이니까 무릎에 어떤 패턴이나 무늬가 있나 생각해 봤지만 그냥 뼈의 골격이 보이는 살덩이로 덮인 뼈다. 그곳에 문양이 있으려면 도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갓 태어나서 엉금엉금 기어 다닌 방바닥의 추억일까. 아니면 인라인 타고 아스팔트에 잘 갈린 무릎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미 다 나이 들어서 골골대는 할머니의 오랜 인생의 무릎 문양일까. 시를 읽기 전부터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제목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했다.


김경주 시인의 기담이란 책은 동네 서점 한구석에 잘 꽂혀있는 것을 샀던 것이다. 보통 눈에 바로 보이는 책이 아니라 한참을 기웃기웃 거려야 발견할 수 있는 위치였다. 당시 대학교 2-3학년이고 김경주 시인의 꽃피는 공중전화라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배워서 '아! 아는 이름이다!'하고 무작정 샀다. 그리고 한참을 내 책장에 처박아두고 잊고 지내다가 브런치에 시 감상을 적는 것 때문에 다시 펼쳐봤다. 그때는 몰랐던 글자의 배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다. 내용은 알쏭달쏭한데 뭔가 아름답고 더 가까워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지금 생긴 것이다. 물론 또 모른다. 가까이 다가가면 내가 생각한 네가 아니야 하고 놀라 도망가고 싶어 질지도. 근데 지금은 되게 반했다.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무릎의 문양이란 제목을 보고 말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초등학생 때 껌을 먹고 난 뒤 얻은 스티커를 팔목에 붙여 손목시계를 만들었던 적을 떠올렸다.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 있지만 문득 떠올라 부제목으로 정했다.


그리고 시집을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내가 고른 것은 타이핑하기 쉬운 것들이다. 가령 취소선이 쭉 그어진 것이나 혹은 동그란 물방울 모양으로 잘린 것이나 아님 마지막에 짧은 한 줄의 시는 내가 그 맛을 살리기 어려워서 포기했다. 그런 것은 확실히 실물로 보는 게 감동인 것 같다.


무릎의 문양


                    김경주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이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출처 김경주 시집 기담, 문학과 지성 2008)



내가 이 시를 타이핑하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1부 2부 3부 이런 식으로 나눠져서 어떤 단편영화의 장면들을 주르륵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해석하기 난해한 구절도 맞닥뜨리고, 이런 부분은 공감도 되는 구절도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 시인을 최근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김경주의 초기 시는 좋았는데 점점 난해해졌다고 한다. 나는 그가 어떤 시집을 어떻게 써서 발간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내게 김지녀 시인이나 심보선 시인이 어떤 시는 좋고 어떤 시는 난해하게 읽혔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도 비슷한 성향끼리 만나면 좋은 시너지를 발휘하듯이 시와 사람도 그러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별로라고 남들도 별로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는 말이 되게 개연성 없으면서도 참신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도 모르게 당장 '무릎'하고 부르면 무릎이 그에 화답하듯이 좋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뒤 이어 나온 말은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이라고 한다. 당신에게 무릎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무와 시간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런 와중 나무는 형체라도 있는데 시간은 형체도 없는 것이 무릎뼈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만약 이 시를 처음 봤다면 저 말들이 뭘까 싶지만 이 시를 다 타이핑한 사람으로 저것은 연로한 어머니의 무릎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은 당신은 어머니를 지칭하는 말이고, 나무는 주름진 것을 표현한 것이고, 시간은 쏜살같이 가버린 세월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무릎의 1차원적인 의미가 시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시인은 무릎을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파문은 수면에 이는 물결 또는 무늬로 이 시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하는 시어이다. 확실히 무릎은 살 속에 파묻힌 뼈로 관절염이나 크게 질병이 없는 이상 몸 밖으로 어떠한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그런 무릎을 저녁에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근만근 몸이 무겁다의 아주 무거운 천근으로, 저녁에 누우면 하루 동안 일했던 무릎의 고통이 연로한 당신의 몸 안을 돌고 돈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도 밤만 되면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앓는 소리를 낼 때가 있다. 바쁘게 활동하는 낮에는 잠깐 잊었다가 한적한 밤에 고통이 머리를 들고 나타나는 것이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여기서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는 것은 '당신'이고, 해골이 된 한 마리 소 역시 '당신'이다. 장성한 자식이 늙은 엄마 곁에서 재롱도 피우고 끌어안고 자는 그런 모습 같다. 그리고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라는 것은 그 무릎에서 오는 고통을 잊게 하려고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역시 당신의 닳고 닳은 뼈이고,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짝 당신의 곁에 다가가 그 신음소리를 못 들은 척 못 본 척 외면하고 잊으려고 애썼다는 식으로 들린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온다는 것은 태어나면서 받은 무릎일까 아니면 나를 보살펴주며 얻어온 무릎일까. 아무튼 이번 생이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릎이 하나의 문명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뜻하고,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는 내가 당신의 고마움을 잊고 산다는 것을 뜻한다고 읽었다. 더 나아가 이제 무릎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어떤 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지난 기억들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시인은 '대기'라는 표현을 썼는데 뒤에 '공기'라는 표현이 나옴으로써 시어를 한 번 사용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문양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형태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이 아닙니다"


나는 실제로 '무릎을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가 있는지 네이버에 검색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물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원앙 다큐멘터리에서 얼핏 서로의 닮은 모습에서 사랑을 느낀다고 들은 것 같다만 정확하지도 않다. 그러나 ebs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이성의 얼굴로 바꿨을 때 쉽게 호감을 느낀다는 결과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인간도 새도 역시 동물이니까 이런 유사한 점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라는 말은 원숭이들이 서로의 이를 골라주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된다'라고 표현했다.


내가 이 시를 계속 보면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면 도대체 이 시에서 '근친'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내 생각 선에서는 상상이 안 간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는 것은 동성동본을 연상하게 하고, 그게 허용되지 않으면 '이 시간과는 근친이 아닙니다'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결론이란 말인가. 혈연에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 아예 다른 객체로 존재한단 말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엄마라는 이름이 붙이기 전까지 그녀와 나는 다른 개체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엄마 이름 안에 갇힌 한 여성의 존재를 '나'라는 사람이 정확하게 인식하고서 이렇게 '근친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 면은 육지에 이어진 땅이라고 네이버 사전에 나와있다. 반도 검색하면 익숙한 에게문명의 발칸반도가 나온다. 해안가 지역이라 외국과 교류가 많아 일찍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다. 화려하고 풍성할 것 같은 문명의 반도 앞에 잊혀진이란 수식어가 붙음으로 그 모든 게 한 철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반짝이고 젊은 시절은 다 가고 무릎이 성한데 없이 골골대는 시절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것을 시인은 그의 무릎에서 '잊혀진 문명의 반도'를 발견해 낸 것이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구절역(Gujeol station, 九切驛)은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송내리에 있었던 장항선의 간이역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된 역이라고 나무위키에 나와있다. 그런 것처럼 한 때는 활발하게 운영되었을 곳이지만 지금은 철거된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과연 여기서 '검은 멍'은 무엇이며 '한 마리의 무릎'은 또 무엇일까. '검은 멍'은 실제로 무릎에 든 멍일 수도 있고, 폐쇄된 구절역의 쓸쓸함 또는 그림자일 수도 있다. 원래 무릎에 검은 멍이 생기는 것일 텐데 순서를 뒤집어서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한 마리의 무릎'이라고 하니까 되게 쓸쓸하고 어디 버려진 동네 똥개가 떠오른다. 시 전반에 깔려있는 정서가 해 질 녘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지는 시간대 같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바지를 벌리고 양반다리를 앉은 모양이다.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 솟은 섬'이라는 표현은 되게 문학적이며 이미지가 또렷하게 연상되어서 좋았다. 여기서 '무릎'이 살 속에서 솟은 섬이라고 말한 것처럼 뚝심 있고 흔들리지 않는 어떤 굳은 의지가 시의 표현에서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보면서 강연호 시인의 봄밤이 떠올랐다. 한밤중에 운동장을 돌며 운동하는 시민들을 보며 '창밖으로는 인공위성처럼 / 밤늦은 시민공원 운동장을 공전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연호 시인은 표현했다. 단순히 운동장을 도는 사람들을 보며 강연호 시인은 인공위성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런 것처럼 여기서 김경주 시인은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어 있는 그'를 보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고 보여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김경주 시인은 계속 제목에서부터 '문양'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보면 무릎에 어떤 문양이 있나 싶은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문양'이 고스란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새겨져 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밤이 되어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준다고 말하며 거룩하고 신성하게 표현하고 있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나는 이 부분이 되게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이란 밤이 되면 찾아오는 고통 같은 것이나 혹은 당신이 보낸 낮의 시간들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란 것은 '나'에게 보여주기 싫은 어떤 모습을 마을에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은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무릎을 매만진다.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라는 표현은 당신도 나도 각자 이 상황을 모른 척 애써 넘긴다는 말처럼 들렸다. 애써 이 고요한 평화를 깨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적도란 지구 위도의 기준이 되는 선으로, 춘분과 추분 때 태양이 바로 위를 지나간다. 당신의 몸속에 있는 세상은 아주 넓어서 내가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당신의 무릎을 베는 순간만 들린다고 한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는 당신의 무릎 속에 흐르는 물을 듣고 내가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저렇게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는 소리라고 표현한 것 같다. 오랜만에 엄마를 찾아가서 애교도 부리고 무릎을 베고 눕기도 하는데 엄마가 아파하고 늙었다는 사실을 자식이 듣는다면 마음이 분명 편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슬프지만 엄마에게 들키기는 싫고 그래서 자식인 나는 저렇게 몰래 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면 김경주의 무릎의 문양은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이해가 바로 되지 않는 것이 매력인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시들은 형태가 가지각색이고 어떤 것은 내게 그냥 글자이기도 하며 감탄이기도 했다. 내가 이 무릎의 문양을 읽어가고 있는데 너무 뻔하게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렇게 혼자 유추하고 상상하는 과정이 꽤 재밌다.



3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온다니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다. 차를 타면 종종 멀미를 하기 때문에 저 기분이 얼마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잘 이해가 된다. 그렇게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던 무릎이 아프다고 신호를 보낼 때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단순히 몸 안에 있는 관절 혹은 뼈가 아니라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라는 추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개념에 대해 타인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엄마도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서 수술을 받았아야 했지만 받지 않고 골골대고 있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 역시 여든 넘게 살아계실 때 지팡이를 짚고 앓는 소리를 자주 내셨다. 아직 그에 비하면 새파랗게 젊은 내가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좀 민망하지만 나도 무릎을 잘못 썼는지 혹은 살 때문인지 가끔 오른쪽 무릎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통증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신호이기도 하면서 몸이 보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이 시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사실 앞에서 무릎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 읽어서는 그게 엄마인지 연인인지 내 이야기인지 잘 눈치채기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떡하니 '늙은 노모'라는 시어가 등장하고 '나'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있다고 한다. 되게 읽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이다. 그런데 뒤 이어 등장한 말은 아주 냉철하게 상황을 직시하고 있다.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되게 자주 듣는 말인데 아직 나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여든의 노모를 9년 전에 보내고 그때 아주 절절하게 울면서 우울해하셨다. 나는 사실 나의 부모님의 죽음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아빠 역시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갔지만 그 사실이 죽음과 바로 맞닥뜨리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와 노모가 도란도란 시간을 보낼 때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는다고 한다. 내 생각에 여기서 새는 '나'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런 새가 '무릎을 핥는다'는 것은 노모의 고통이 낫기를 바라며 하는 걱정 혹은 챙김일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연약함은 노모의 연약함이고, 가장 무서운 음절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를 읽는데 왜 이렇게 씁쓸하고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릴까.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라는 말은 살아있다는 것은 피붙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그것'은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이며,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늴는지'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은 과연 따뜻할까 아님 차가울까. 나는 둘 다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눈이 녹으면 물이 되듯이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는 당신이 떠나간 후의 슬픔이 내 안에 눈처럼 내리고 있다는 말 같다.


마지막 구절이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이고 이것은 사실 볼드가 아니라 기울기였지만 그 기능을 찾지 못해서 볼드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줄줄이 생각하면서 읽어보니까 마지막에 굳이 '무릎의 친족관계'가 아니라 '무릎의 근친'이라고 한 것은 노모와 내가 피가 닮지 않아도 우리는 유사한 점이 많은 하나의 인간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솔직하게 근친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바로 떠올라서 나는 왜 시에 저런 단어가 껴있나 퍽 난감했다. 근데 지금 보니까 되게 비장하고 되게 선언적인 구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유전이 무섭다. 아빠가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어서 나 역시 비슷하게 있고, 엄마가 우유를 먹으면 잘 체해서 동생 역시 우유를 기피한다. 그런 것처럼 노모가 무릎이 아팠으니까 어쩌면 그 자식인 나에게도 그 질병이 유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읽고 싶다기보다는 차마 다 뱉어내지 못한 눈물로 해석하고 싶어 진다.



이것은 사담이지만 나는 대학생 들어갈 때 본 면접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학교 폭력을 주제로 발표하는 것인데 동생 얘기를 꺼내면서 울컥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아주 담담하게 적었고 적을 당시만 해도 크게 감정의 동요가 없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그런 것처럼 무릎의 문양도 이 시 감상을 적으려고 지금 며칠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적다가 나도 모르게 슬픔이 진해지는 구간이 있었다. 정말 예상 못한 순간이다. 예상 못한 이야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되게 재미있는 순간들이었다.


맨 위에 무릎의 문양을 보고 막연하게 초등학생 시절 손목에다가 스티커를 붙이고 엄마에게 많이 혼났던 게 떠오른다. 끝까지 읽어보니까 아주 상관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시 무릎의 문양에서는 노모와 내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있던 추억이고, 나는 초등학생 때 엄마가 목욕시키면서 스티커를 박박 문대던 추억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시를 쓴다면 '껌이 뱉은 스티커의 문양'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정말이지 화장실에서 엉엉 울면서 목욕하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니까 잘만 떠올리면 시 한 편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시를 읽으면서 1편 2편 3편으로 단편영화 같다고 처음 말했다. 그런 것처럼 1편은 무릎에 대해 설명하고, 2편은 무릎의 고통에 대해 내가 발견한 것이고, 3편은 무릎이 떠나간 자리를 내가 회상하는 것 같다. 확실히 시에서 어떤 서사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분명 시인이 어떤 의도를 갖고 시를 썼지만 내가 배경지식이 부족해서 와닿지 못한 시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면 되게 크게 와닿는 것 같다.


사실 이 시를 대강 훑어봤을 때 나는 내가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것이라고 전혀 상상을 못 했다. 그냥 흘깃흘깃 봤을 때 시의 표현이나 구조가 마음에 들어서 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해석이 완전히 틀렸을 수도 있겠다만 이런 감정적인 접근이 이 새벽에 나의 마음을 울렸다. 신기한 경험이다. 이런 것은 마치 첫인상은 도도하고 세련된 것 같은 애가 알고 보니 사골 국물처럼 진한 사람이었다는 판가름이 난 것 같은 일이다.


솔직히 대학교 때 시를 읽고 감상을 적을 때는 의무감이 더 앞섰기 때문에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 이 시간이 꽤 소중하다. '아, 나도 시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는 나를 조금은 더 다채롭게 혹은 단단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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