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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담 May 14. 2024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낯선 단어들의 향연, 박정대 시인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박정대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기억하는지 톰, 그때 우리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에서 술을 마셨지


검은 밤의 틈으로 눈발이 쏟아져 피아노 건반 같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톰, 너는 바람 냄새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


집시들이 다 그 술집으로 몰려왔던가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인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출처,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2 올해의 좋은 시 100선 _아인북스 2012>




일단 제목부터 끌렸다. 도대체 톰 웨이츠는 누구이며 제목에 좌파적이란 수식어가 왜 들어갈까. 톰 웨이츠, 좌파적, 저녁이라는 세 단어의 조합은 믿고 먹는 꿀조합의 식사처럼 나의 구미를 당겼다. 뭔가 서정적이고 강한 울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서 시를 읽었는데 지금까지 봤던 시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생각했을 때 더 시 다웠다고 해야 할까. 시 하면 저렇게 은유적인 표현도 많이 들어가고, 어떤 감성적인 표현도 있어야지 하는 그런 것에 박정대 시인의 시가 부합했다. 나는 그의 시가 마치 영화로 따지면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조금은 쓸쓸한 듯하면서도 속은 따뜻했던 그런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외로운 듯 하지만 곁에 그대가 있어서 외롭지 않았다고 잔잔히 시가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박정대 시인이 누군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인터넷에 검색해 보았다. 1965년 생이라 우리 아빠와 동갑이시고, 긴 장발은 수수한 얼굴과 아주 잘 매치되는 세련된 아저씨였다. 우리 아빠는 흰머리에 얼굴 새까만 전형적인 시골 감자 같은 느낌이라면 박정대 시인은 굉장히 길쭉하고 세련된 대파 같은 인상을 받았다. 아무튼 나는 그의 시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톰이란 사람과 시 속의 화자가 오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는 듯한 대화체가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마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유명 소설가를 만난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뭔가 꿈같기도 하고 몽롱하기도 하면서 반짝거리는 것 같다. 내가 이 시를 다 타이핑하고 나서의 감정은 '진짜 시 잘 썼다. 어떻게 이렇게 썼지?'였다. 내가 대학생 때 그토록 쓰려고 몸부림쳤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 네 노래를 듣는 좌파적 저녁

기억하는지 톰, 그때 우리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에서 술을 마셨지


아픈 왼쪽 허리를 낡은 의자에 기대며,라는 첫 구절부터 나는 이 시에 매료되었다. 이근화 시인의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라는 시에서 '한 계절에 한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번씩 이를 뽑는 것' 1)처럼 아주 구체적이라서 마음에 쏙 든다. 그런데 도대체 왜 좌파적 저녁일까 싶었는데 톰 웨이츠의 노래를 들으니까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투박하며 거칠고 정적이고 낮은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부른 time 2) 이란 곡에서 '그리고 그림자 소년들은 모든 법을 어기고 있어요.'라는 구절에서 '촛불' '키스'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문제에 눈을 돌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사회적 불평등한 상황 속에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좌파라는 단어와 톰 웨이츠란 단어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다시금 생각해 보니까 아픈 몸으로 톰의 노래를 듣는 것은 어떤 치유적 행위임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톰 웨이츠의 노래는 무뚝뚝한 듯 하지만 그 속은 아주 따뜻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화자는 말하고 있다. '기억하는지 톰, 그때 우리는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에서 술을 마셨지'라고. 사실 저 정도로 아주 디테일하게 우리가 만났다고 주장한다면 아예 초면인 사람도 긴가민가할 것 같다. '눈 내리는 북구의 밤 항구 도시'는 어디였을까. 아주 낭만적인 단어들의 총집합 같다. 하얀 눈도 왠지 모르게 사선으로 북받치듯이 내리는 아주 추은 겨울밤 쓸쓸하고 적막한 항구 도시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에 나오는 시적 배경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1) [출처]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작성자 cafesunray

2) https://blog.naver.com/gy007/222780103631



검은 밤의 틈으로 눈발이 쏟아져 피아노 건반 같던 도시의 뒷골목에서 톰, 너는 바람 냄새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

집시들이 다 그 술집으로 몰려왔던가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


나는 이 표현이 되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검은 밤의 틈으로 눈발이 쏟아져 피아노 건반 같던 도시의 뒷골목'이란 표현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눈이 내리는 어느 도시의 밤을 흑백이라는 공통점을 끌어와 피아노 건반이라는 은유로 완성시킨 것이다. 나 역시 눈 내리는 날 밤 도시를 걸어본 적 있으며 또 어릴 적에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지만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뒷골목이라는 단어가 앞에 쭉 나온 묘사들을 한 방에 업그레이드시키는 요리로 치자면 킥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잘 다니지 않는 뒷골못이라면 뭔가 비밀스럽고 은밀한 일들이 쉬쉬거리며 일어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자는 톰에게 너는 '바람 냄새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지'라며 그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만약 내가 유튜브에서 안 들었다면 저 은유가 그렇게 와닿았을지 잘 모르겠다. 정말이지 바람 냄새도 나고 차갑기도 하는 어느 도시의 뒷골목의 담벼락 같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표현 역시 화자가 톰의 노래를 극찬하는 내용들이다. '집시들이 다 그 술집으로 몰려왔다던가'는 자유롭게 떠도는 집시에게조차 톰의 노래는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와 집시들마저 술집으로 몰려오게 했다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마성의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매력적인 꽃이 자유롭게 떠돌던 나비를 자신의 영역으로 초대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네 목소리엔 집시의 피가 흘렀지, 오랜 세월 길 위를 떠돈 자의 바람 같은 목소리'라는 표현은 아주 예술적이다. 이것은 꼭 집시라서 그렇다기보다 길 위를 떠돈 서러움을 아픔을 알고 있는 바람 같은 목소리란 말이다. 뭔가 바람처럼 목소리 사이사이에 공백이 많기도 하고, 어떤지 힘이 없어 보이기도 하며, 또 바람처럼 포근하고, 친숙한 느낌이기도 하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 아니라 치유의 개념이지 않았을까 싶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그런 목소리 말이다.


북구의 밤은 깊고 추워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노래를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았지만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인 은둔자였지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


북구의 밤이라 하면 확실히 추울 것 같다. 그곳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듣던 사람도 모두 부랑자 같다고 한다. 아무래도 따뜻한 기후인 남쪽에는 농사를 짓기 좋아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북쪽은 기온이 낮으니까 비교적 식량도 적고 사람이 살기 척박하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느 쪽이 더 잘 살고 더 못 사는지 비교할 수 없이 전체적으로 살기 힘든 환경을 저 노래 하나로 시인은 표현하고 있다. 그런 안 좋은 상황에서도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인 은둔자였지'라고 하고 있다. 뭐랄까, '아무렴'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느낌은 불행하지만 긍정적으로 이겨내려는 느낌도 있고, 불행에 익숙해져서 어떤 것이 와도 놀랍지 않다는 느낌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화자는 우리는 아무거도 꿈꾸지 않아 모든 걸 꿈꿀 수 있는 '자발적인 은둔자'라고 하고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무엇이라도 되고 싶은 그런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은둔자라는 말은 숨어 사는 사람이고 가난은 자발적일 수 없는데 자발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우리를 더 처절하게 혹은 불쌍하게 그리지 않고 있다. 분명 아픔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아픔에 처절하게 빠져있다기보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자신의 처지를 긍정하는 뉘앙스로 들린다. 그래서 더 멋졌던 것 같다. '생의 바깥이라면 그 어디든 떠돌았지'라는 말처럼 자신의 아픔을 토대로 남의 아픔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시와 시 사이의 이미지 연결이 매끄럽고 통통 튀는 표현이 즐거워서 골랐다. 그런데 그 이면에 담긴 내용은 '불행 속에서도 자신을 긍정할 줄 아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내용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것 같다. 되게 잔잔한 어조로 반짝거리는 이미지를 그린 시 같다.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 루이 아말렉은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올리비에 뒤랑스는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


나는 여기서 루이 아말렉과 올리비에 뒤랑스란 사람이 등장하길래 톰 웨이츠처럼 유명하거나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은 박정대 시인의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이란 시를 올린 네이버 블로그에만 적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사람은 평범한 소시민으로 우리처럼 심야의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렀고, 술에 취해 하염없이 문밖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축구 경기도 오지 않은 승리를, 술 취해 문밖을 보는 것은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삶이란 원래 그런 것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며 노래나 부르는 것'이라는 멋진 표현을 했다.


하염없이 바랐단 것은 어떤 부일까 혹은 행복일까. 기다리다 지쳐 혼자 노래나 부르는 것이 기다림이라니.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에 모든 성냥을 태우고 환한 불빛 아래 자신이 상상하던 풍요로운 집안의 풍경을 상상하다 죽어가던 것이 떠오른다. 여기서 나는 '기다림'이라는 감정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연락이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직장 구하기를 기다리는 취준생으로서의 기다림, 내 마음이 조금은 더 평안해지기를 기대하는 기다림. 윤하의 기다리다는 곡이 떠오른다. 기다림은 설레기도 하지만 지치기도 하고 고단하기까지 하다.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은 시인이 설정한 어떤 이름의 어떤 삶일 것 같다. 실존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런 시간 말이다.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


화자는 부랑과 유랑의 차이는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다. 네이버 사전에서 부랑은 일정하게 사는 곳과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하고, 유랑 역시 유랑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닌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전적인 의미는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랑은 뭔가 노숙자 혹은 실직자 느낌이고 유랑은 정처 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사람 느낌이다. 실제로 부랑은 뜬 물결이고 유랑은 흐르는 물결이다. 떠있는 것과 흐르는 것은 같은 물결이지만 움직임이 있냐 없냐의 차이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모르지만 '두고 온 시간만은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겠지'라고 얘기하고 있다. 두고 온 시간이란 떠있거나 흘러갔거나 정처 없이 떠돌던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 추억의 선반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는 뜻은 무의미하지 않고 자신 안에 차곡차곡 잘 쌓여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실 나도 한 유랑했다면 했다고 할 수 있다. 혼자 한옥마을도 가고 아쿠아리움도 가고 또 카페 가기와 영화 보기 혹은 칵테일 바 가기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혼자서 정처 없이 걷고 있으면 여유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혼자라서 눈치 볼 대상도 없고 혼자라서 무료하기도 하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잘 쌓여 있어서 그럴까, 이 시에서 공감되는 포인트가 많은 것 같다.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에서 늦게라도 친구들은 술집으로 모여들었지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는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지


죽음이 매순간 삶을 관통하던 그 거리라는 것은 이들의 삶이 죽음과 매우 맞닿아있다는 얘기 같다. 그런 거리라도 친구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거리에는 이탈리아 양아치 탐정 파울로 그로쏘가 검은 코트 차림으로 왔고, 콧수염의 제왕 장 드 파는 콧수염을 휘날리며 왔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파울로 그로쏘와 장 드 파 역시 네이버에 나오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람 이름이 나오니까 정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느 세상에 살았던 인물일까 점점 헷갈리는 것 같다. 위에 나온 말처럼 시간의 문 틈 사이로 보이던 또 다른 생의 시간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아진다. 그리고 양아치 탐정이란 말과 콧수염의 제왕이란 말이 위트 있게 느껴진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


이런 글귀도 너무 좋았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시였지'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컸던 것 같다. 일단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라는 것'은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는 어떤 생각 어떤 추억 어떤 감정들이 담겨 있으니까 쉽게 납득이 가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도로의 가로수의 내면이나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돌의 내면이라고 생각해서 더욱 멋지게 느껴졌다. 그런 동시에 죽어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은 사람일지라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지나간 시간들과 그의 내면 역시도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점이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 같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고 생각하고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는지 톰, 밤새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

죽음이 관통하는 삶의 거리에서 그래도 우리는 죽은 자를 추모하며 죽도록 술을 마셨지


보면 볼수록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이라는 시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시 같다. '기억하는지 톰,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 가장 서럽게 노래 불렀던 것이 너였다는 것을'이라는 말은 꼭 진지한 고백처럼 들린다. 네가 얼마나 멋진 인간인지 화자가 톰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는 '가벼운 생들처럼 눈발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날 밤'이라는 표현이라던지 아니면 노래를 부르는데 '가장 서럽게'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던지. 박정대 시인이 얼마나 시를 아름답게 반짝이게 표현할 줄 아는지 이 시를 통해서 잘 알게 되었다. 아마 그래서 블로그에도 그의 시가 게재된 것 같았다.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모인 우리가 밤새 찾으려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이 시는 마지막까지 낭만적이다. '밤새 눈이 내리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갈 즈음'에서 추위가 눈발에 묻혀가는 모순된 표현도 아주 멋지고 또 거리의 적막과 고요함을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리고 탐정이었던 파울로의 작은 손전등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우리 역시 귀엽게 느껴진다. 우리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라는 말에는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담담하게 독백하는 것처럼도 들린다.


이  시 전체에 깔린 배경에는 '밤' '눈' '술집' '탐정' '콧수염' '항구' 노래' 유랑' 등으로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또 마냥 외롭지는 않은 어떤 가상의 도시가 떠오르고 분위기가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패잔병처럼 고통이 느껴지면서도 병사로서의 어떤 긍지와 기지를 잊지 않은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테라스가 떠오른다. 노란 조명에 반짝이는 동시에 밤하늘은 깜깜한 것이 대조적이며 무척 눈물 나게 아름답게 인식되는 명화 말이다.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박정대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자신의 인생에서 찾던 실마리를 찾았을까 아니면 아직도 찾던 중에 이런 시를 쓰게 된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한 사람으로 쓴 자기 고백적인 시처럼 느껴졌고 그리고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어떤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해서 아름답게 잘 풀어낸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시를 서른이라는 나이에 만난 것도 행운이다. 좀 더 어린 십 대 혹은 이십 대에 만났다면 그 느낌은 또 달랐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 아저씨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하며 시집을 덮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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