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영감독의 영화 <만약에 우리>를 봤다.
만약에...
만약에...
이 막연함을 부르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쉬움
미련이란 감정이 가장 크겠지.
2009년쯤에서 시작되는 영화 속 이야기가 나의,
아니 우리의 과거를 소환했다.
2009년 12월 13일에 우린 결혼했다.
결혼 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린 옥탑에서 반지하에서 동거를 했더랬다.
우린 그들과 다르 게
결혼했지만
쨍한 해가 쏟아지지 못했다.
그들처럼 가난했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며
비난하고
탓하고
옹졸하게 굴며
어둠에 싸여있던 날들이 이었다.
문가영의 외형적 변화가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름 세상에 도전하고 싶었던 나름 화려했던 20대
아이를 키우며 초췌한 모습으로 언제 이 시공간을 떠날 수 있을까 암흑 속을 살던 30대
이제야 도약이란 걸 해 볼 수 있을까 싶은 40대가 오버랩되었다.
20대의 나는 꿈이 없었다.
그냥 살았다. 그것도 열심히 맹목적으로.
그럼 그냥 잘 살아지는 게 인생인 줄 알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그랬으니깐. 얼마나 평탄하고 안일한 삶 속에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28살 후반, 결혼을 했다. 둘이 벌었다.
그러니깐 당연히 돈이라는 게 금방 모여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혼자 살 때보다 둘이 살 때 소비되는 비용은 두 배 이상이었다.
30대 초, 아이들이 한 명씩 태어나 두 명이 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다섯 배 이상 돈이 들어갔다. 거기다 나는 아이를 돌보아야 했기에 온전한 일을 할 수 없어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삶이 힘겨웠다.
애 잘 키워보겠다고 애먼 짓으로 오천만 원을 날리고, 남편은 음주 운전으로 벌금과 합의금으로 2천만 원을 날리고. 전세보증금은 올라가고. 반월세를 왔다 갔다 하며 살았다.
그때 그 시절 얼마나 울고불고했던가.
얼마나 싸웠던가.
얼마나 심파였던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러다 내가 살고 싶지 않겠다 싶었다. 무너지겠다고나 하는 순간, 놓았다.
일을.
그리고 숨을 쉬고, 책을 들고, 펜을 들었다. 썼다.
그러다 알았다.
나의 이 고난을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는 걸.
내 희생을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심파는 짜증 나는 장르였다.
내가 하고 싶은걸,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고 싶었다. 작게. 책 보는 것부터, 필사부터, 독서모임부터. 그러면서 나를 돌아봤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희생을 했다고 하지만
그 안을 바라보면
누군가는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 안에 있었던 것도 이제는 안다.
지나간 일이고
되돌릴 수도 없다.
단, 떠밀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아갈 수밖에!
만약은 통하지 않는 마법이니깐.
그럼, 살아야 한다, 지금을.
알면서도 감성이 이성을 따라주지 않을 때,
만약의 마법을 바라는 날에는
쓰는 것이다.
만약의 마법은 안 통하겠지만
흰 여백의 마법은 후련함이라는 신통력을 발휘해 주니깐.
고난과 역경이 없는
안일한 삶을 추구한다고 웃고 있는 나는
사실 내가 겪은 손톱만큼의 상처가 소금이 닿은 듯 아프기 때문에 그런 거 일 수도 있다.
그냥 아프다고 하자.
내가 아프다는데, 그 어떤 미사여구가 이유가 왜 필요할까.
나 그때 많이 아프고 힘들었다.
그때는 지금 같은 미래를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을 것 같았는데
어차피 죽을 거니깐
웃었다.
내 새끼들이랑 만큼은 행복하고 싶어서
미친 듯이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랬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지금이다.
희생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만약을 잊고
좋아하는 거
웃을 수 있는 거
그리면서 일정한 수입을 원했다.
그랬다.
내가 바라는 걸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살아가자 삶이 구체 적여지기 시작했다.
아직 미미하지만.
만약을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 할 수 있는 걸
곁에 있는 사람을 챙기지만
그 이전에 나를, 챙기는 것
그래야 삶을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이제 알아가고 있다.
이러다가도 또 엎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꺾기며
살아나는 게
삶이다.
이 이후의 삶은 또 어떻게 이어질까,
최소한 만약보다
지금을 떠올리며 살자.
만약에 마법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