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그의 다정함에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 2년이 넘도록 강의실에서 같은 자리에 앉은 적도, 술자리에서조차 그는 그녀의 옆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 날부터 서서히 서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녀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종종 책 선물을 해줬다. 그리고 그 책 사이에는 항상 도서 상품권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그의 그런 자상함에 점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될 때쯤, 그는 그녀에게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충전소 아르바이트였지만 그에게 끌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홀린 듯 같이 면접 보러갔다. 면접을 보고 그녀는 낮에, 그는 야간에 일을 하게 되었다. 둘이 일하면서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지만, 그녀가 종종 그가 일하는 시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오곤 했다. 그리고 둘이 같이 쉬는 날엔 영화도 보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그녀는 속으로 '이게 사귀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도, 그녀도 아무런 말 없이 서서히 만남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말했었다.
"네 눈을 보고 말하는 게 좋아. 검은 눈동자가 어떻게 이렇게 크고 검을 수가 있어. 눈이 맑고 예뻐."
이 말을 듣고 그녀는 거울 속에 자신의 눈을 가만히 오래도록 보았다. 그녀는 늘 자기 눈이 콤플렉스였다. 그녀는 외모에 자신이 없었기에 대학 다니는 동안 단 한 번의 미팅과 소개팅도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휩싸여 살았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그가 다가와 달콤한 속삭임을 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던 어느 날 주말 아침, 그녀는 그가 자취하는 자취방으로 버스를 타고 향했다. 양손에는 그가 좋아하는 과일과 같이 먹을 간식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다행이었을까.
그녀는 그의 자취방 앞에서 노크를 했다. 한참이 지나도 기척이 없었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오빠~ 00오빠~"하고 외쳤다. 그는 어기적어기적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야?"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는 눈이 커졌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것처럼 그보다 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손에 있던 걸 그에게 전해주곤
"아, 그냥 심심해서 잠깐 들렸어. 이거 먹어. 나 갈게."하고 급하게 뒤돌아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밤새도록 고열이 시달리며 끙끙 앓았다. 그에게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끝이났다. 개강하고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그녀는 그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녀 곁으로 다가 오지 않았다. 개강 파티 술자리에서 그녀는 술을 퍼부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소주를 연거푸 입에 털어 넣었다. 그녀는 그와 있었던 일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얘기 좀 하자."하며 그녀를 끌었다. 그녀는 그를 따라 나갔고, 그는 그녀에게 그제야 고백이라는 걸 했다. "나 너 좋아해." 그녀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아해? 좋아하는 데, 그럼 그다음은? 그럼 그때 그 여자는?' 그녀는 그때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 맴돌던 여자였다. 둔했던 그녀가 뒤늦게 알아챈 거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에 오히려 더 화가 났다. 어쩜 그녀는 그날 이후로 그를 천천히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하자." 무엇을 시작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렇게 그와의 인연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와 그는 취업을 했고, 몇 년이 흐른 뒤 네이트온으로 둘은 연락이 닿았고, 둘은 만났다. 그 당시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첫사랑이었던 그가 종종 생각났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출장 간 사이 첫사랑의 그를 만났다. 물론 그에게 남자친구가 있음을 밝혔다. 그녀는 그를 보면서 아득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과 '좋아해'라는 말을 해 준 사람. 그가 있었기에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것에 대한 마무리를 하고 싶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녀는 그를 만난 걸까. 그 이후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