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쓰다2기 day5
아르바이트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사회생활에 대한 환상과 그 보상이 굉장히 달콤할 거라 여기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는 쓴맛이었다. 이 쓴맛을 끊을 수 없게 하는 '돈' 맛의 유혹, 아르바이트를 통해 알아버렸다.
대학교를 입학해 처음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공장 아르바이트였다. 핸드폰 진동판에 들어가는 작은 필름지를 성형하는 일이었다. 기계에 필름지를 넣었다 뺐다 하는 일이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필름지를 넣기 전에 필름지에 분칠을 일일이 다 해야 한다. 그리고 필름지를 성형기에 넣었다 뺀 후, 불량 난게 있는지 없는지 잘 검수해야 한다. 불량이 난 부분은 유성 펜으로 체크해서 한쪽으로 모아놓으면 작업이 완료된 것이다. 한 시간 시급이 2,500원이었다. 친구 셋과 같이 시작했지만, 친구 둘은 나중에 그만두었고 나는 그 알바를 꽤 오랫동안 지속했다. 2년 넘게 한 것 같다. 처음 시작은 방학 때 5시간 정도였다. 방학 때만 하려고 했던 알바였는데, 학기 중에 더 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공장이 바쁠 때는 학기 중에도 하교 후 6시부터 10인지 11시까지 알바를 하기도 했었다. 경력이 점차 쌓이면서 방학 때는 직장인처럼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했다. 나중에는 졸업하고 공장와서 일하라는 소리까지 듣을 정도였다. 공장을 관리하는 과장님은 컴퓨터 작업을 할 때 어려운 게 있으면 나를 불러 묻곤 했었다. 나중에는 반 직원이 되어 아주머니들과 같이 회식도 하고, 휴가 때 휴가비도 챙겨 받았다. 내가 그곳을 그만두고 나올 때, 우리 엄마를 소개했다. 엄마도 그곳에서 꽤 오래 근무했다. 엄마는 그때 같이 일했던 아주머니들과 아직도 인연을 맺고 계신다.
다음 알바는 초등학생 과외였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길게는 하지 않았는데, 했던 알바 중에 제일 쏠쏠했던 알바였다. 친구의 소개로 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도 그 뒤에 학원 알바를 했다. 교직 이수로 교생실습을 한 뒤 자신감이 생겨서 도전해 본 일이었다. 학원 알바도 다른 일에 비해 시급이 꽤 괜찮았다. 그러나 3달인가 4달밖에 하지 못했다. 이유는 원장이 월급을 제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당함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2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감정노동이 심했다. 밀린 월급을 받는데 일했던 만큼의 시간이 들었다.
주말에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했었다. 선배네 부모님이 하는 추어탕 집이었다. 생각보다 내가 일머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식당 알바를 하면서 고추다지는 거, 버섯 쪼개는 것 등을 배웠다. 일머리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열심히 하는 나였다. 점심 장사를 하고 나서 저녁 장사까지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잠깐의 시간이 꿀 시간이었다. 식당 한구석에서 방석을 깔고 나도 모르게 곤하게 잠들곤 했었다. 사장님이 무섭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나름의 다정함이 있었다. 그때는 그걸 잘 몰라 사장님을 마냥 무서워만 했다.
가장 힘들었던 알바는 떡집 알바였다. 추석 전에 떡집에서 떡을 빚는 일이었다. 중노동도 이런 중노동이 없었다. 동아리 남자애 한 명이 같이 하자고 제안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래"하고 했다. 일당이 생각은 안 나지만 다른 알바에 비해 꽤 도톰했다. 그래서 덜컥한다고 갔는데, 다른 알바에 비해 백 배는 힘들었다. 오후에 가서 아침에 해 뜰 때까지 작업을 했다. 술 떡 반죽을 젖는데 팔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새벽을 맞으며 집에 들어왔다. 녹초가 된 몸을 뉘고 싶었지만 큰 집인 우리 집엔 친척들로 꽉 차 있었다. 겨우 책상 밑 귀퉁이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식물원 알바, 교통량 체크 알바, 전단지 알바, 옷가게 알바 등을 했다.
결혼 후에는 편집팀 알바를 1주일 넘게 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밤샘 작업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세탁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몸에는 무리가 가지 않았고, 백만 원을 벌어서 그 돈으로 세탁기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고서 작업 알바를 두 달해서 산후조리원 비와 아이 출산에 필요한 용품들을 준비했다.
첫째 아이를 낳기 전에 다시 직장에 다니다가 육아 휴직 기간에 잠시 영업사원 일을 해 보기도 했다. 6개월이 6년처럼 길게 느껴질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그 후 회사에 다시 복직해서 다녔고, 둘째 낳고 육아휴직 후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는 놀이시터 활동을 했다. 이건 아르바이트가 아닐까? 나름 개인 사업인가? 지역 카페에 글을 올려 놀이시터가 필요한 분이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나름 잘나가던 놀이시터를 3년 하다가 그만두고 보육교사의 길을 갔다. 보육교사 3년을 하고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또 가만히 잊지 못하고 책값을 벌겠다고 아이 픽업 도움이 알바를 했었다. 학교 앞에서 아이 학원 버스만 태워주면 되는 일이었다. 한 번 할 때마다 1만 원이었다. 놀면서 하기 딱 좋은 일이었다.
2020년부터는 회사에 소속돼서 일을 하고 있다. 20대 시작과 동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이후로 돈에 대한 걱정을 늘 했다. 혼자 독립하기 전까지 아르바이트는 용돈을 충당하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나와 혼자 자취를 시작하면서 '돈'은 생계였다. 결혼하고 나서는 '돈'에 더 목이말라 아등바등 했다. 지금은 내가 아등바등 한다고 돈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돈'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돈'이 벌어지길 바란다. 아직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서서히 가고 있는 중이라 여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