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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나 Sep 01. 2020

이제 그만 퇴사하겠습니다

내가 20대에 가장 잘한 일





나는 25살에 회사에 첫 입사했다. 휴대폰 사용설명서를 제작하고 다국어로 번역하는 회사였다. 한창 서류 광탈을 경험하고 극심한 취업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기에,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일을 기다렸다. "이쪽은 우리 영문팀에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온 최은나씨예요. 잘 적응할 수 있게 옆에서 많이 도와줍시다." 나는 잔뜩 얼어있는 그야말로 사회 초년생이었다. 매일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며 예쁨 받는 신입사원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밤 10시가 넘어 퇴근하는 날이 많았지만 앞만 보며 열심히 일했다.


마침내 3개월의 수습 기간이 지나고 정규직이 된 날을 기억한다. 감액되지 않은 첫 월급을 받고 점심시간에 은행에 가서 적금 통장을 만들었던 날. 통장에 선명하게 찍힌 적금 액수를 보며, 회사에 대한 충성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설렘, 그리고 앞으로 적금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갈 금액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던 시기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또다시 봄이 되었다. 일은 제법 익숙해졌지만 야근을 하는 날은 늘어만 갔다. 매일 똑같은 업무를 하고, 매뉴얼에 있는 오류 개수로 평가를 받았다. 팀에서 막내였던 나는 늘 다른 팀원들보다 많은 프로젝트를 맡고 더 늦게 퇴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내게 일을 떠넘기는 선배와, 늘어만 가는 업무량이었다.


일이 많다고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와 잘 맞지 않는 듯한 반복적인 업무에, 나에게 자신의 일을 시켜놓고 옆에서 인터넷 쇼핑만 하다 퇴근하며 야근 수당을 챙기는 선배의 모습에, 며칠을 고생해 프로젝트를 끝낸 팀원들에게 격려 한 마디 없는 상사를 향한 실망감에, 사회 초년생의 열정이, 첫 적금통장을 만들었을 때의 충성심이, 서서히 사그라들어갔다.


내가 더 즐길 수 있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일이 늘 즐거울 순 없어도 보람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이 회사에서 3년 더 일하면 난 어떻게 되어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원들과, 팀장, 관리자들이 인상을 쓰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 성장하고 발전해나가고 싶은데, 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일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자리만 지키며 버티고 앉아 안주하며 사는 삶이 익숙해질까 봐 두려웠다.


내가 더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성장할 수 있고, 인정받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그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을 때 설레고 가슴이 뛰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언어와 글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리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영어 공부를 할 때 행복하다고 느꼈다. 영어에 대한 애정이 컸던 만큼, 영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우연처럼, 회사 동료 언니가 통번역사 준비를 잠깐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통번역이라는 일은 내가 바라는 것들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통역사가 될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다시 월급도 못 받고 학생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통번역대학원 입학시험이 어렵다는데, 만약 안되면 어떡하지, 걱정거리들이 떠올랐지만 멈춰 서야 할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결정하고 나자 가슴이 후련했다. 26살의 여름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난 통역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해 가을, 팀장님에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뭐 하려고?”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려고요.” 말로 내뱉자 내가 내린 결정의 무게가 실감이 났다. 팀장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불평 없이 묵묵히 일하던 내가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 놀랐다며,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했을 테니 말리지 않겠다고 했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고, 눈이 내렸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동료들과 많은 커피를 함께 마셨다. 12월 마지막 날, 사표를 쓰고 첫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훗날 이 결정은 내가 20대에 가장 잘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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