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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나 Sep 11. 2020

내가 그렇게 에프엠인가요?

그런 모습도 아닌 모습도 모두 괜찮아





"누나,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지방에 사는 동생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서울에 올라왔다. 이틀 일정으로 올라와 하루는 내 오피스텔에서 자는 일이 많았는데, 간혹 하루나 이틀 전에 통보해올 때면 난 예민하게 쏘아붙였다. 나도 일정이 있으니 미리 알려달라고 했잖아, 하고. 그런 나를 보며 동생이 했던 말이다.


그 당시 나는 루틴에 집착했다. 잘 짜 놓은 계획표대로 하루가 무리 없이 돌아가길 원했고, 약속이 변경되거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하루에 단 30분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양, 일정과 일정들을 퍼즐 조각들처럼 짜 맞춰놓고 그대로 움직였다.


주중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퇴근하며 회사 셔틀버스 안에서 저녁 일정을 위한 동선을 짰다. 하루를 마치고 마스크팩을 얼굴에 착 붙이고 누우면, 오늘도 열심히 산 듯한 느낌이 만족스러웠다. 주말 계획도 짜여 있어야 했다. 별 약속 없이 쉬더라도, 쉬는 날이라는 계획이 미리 있어야 마음이 편했다.


종종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일부로라도 계획 없이 움직여보려고 노력했다. 정해놓은 루틴을 벗어나 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하루를 완벽하게 꽉 차게 보낸다는 느낌에 안도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하루를 어느 정도는 이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동시에 코로나가 터지고,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건 단지 남은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 아닌, 서로의 공간과 시간이 함께 스며들어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명상을 하기 위해 조용히 앱을 켰다가 바로 끄는 일이 아졌다. 책상에 앉아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가도, 이야기가 하고 싶다며 방에 들어오는 남편과 차를 마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시간을 양보해야 하는 일들이 하루에도 수시로 생겼다. 예정에 없던 낮잠을 자고   수면 패턴이 무너져, 한동안을 올빼미로 살다 멜라토닌을 사러 가기도 했다. 종종 내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틀에 쫓겨 뾰족해지는 일이 있어도  동요 없이 평온하게 기다려주는 얼굴을 보며, 나도 조금씩 느긋해졌다.


둘이서 함께 살아가는 하루는 예전에 내가 혼자 보내던 하루보다 느슨했지만, 놓치면 손해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만큼, 내려놓은 시간만큼, 한 사람의 온기가 꽉 채워져 들어왔다.


나의 갈 곳 잃은 루틴에의 집착은 대신 다른 곳으로 옮겨 붙었다. 자기 전 세수를 하고 예민한 피부에 토너와 크림을 신경 써서 차곡차곡 바르고(그동안 손으로 다른 것들을 절대 만지지 않는다), 커피 필터를 다시 헹궈 건조해놓고, 수건을 적셔 널어놓고, 베개 옆에 아로마 오일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것들.


살아가다 보면 촘촘하게 짜 놓은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날들도 올 것이다. 아이가 생기면 내 시간을 갖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도 간접경험을 통해 배웠다. 그러다가 환경이 바뀌면, 또는 코로나가 걷히면, 또다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완벽하게 채운 느낌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습도 괜찮다고, 그 또한 내 삶의 한 시기라고 생각하며 몸에 힘을 빼고 흘러가 보면 어떨까.


당시에 조금이라도 더 잘 살아본다고 몸에 힘을 주던 그때의 모습도, 지금의 내 모습도, 모두 괜찮다. 한때는 전부인 줄 알고 잡으려 하던 것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나도 모르게 내려놓은 걸 보며, 삶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또 어떤 시간을 살게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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