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은나 Sep 21. 2020

도넛을 먹으며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한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며 행하는 9월의 의식




9월이 되자 지역 카페 게시판이 도넛' 얘기로 가득했다. 어디 도넛이 맛있다느니, 올해는 드라이브 스루만 가능한 곳이 많다느니, 하며 시나몬 가루가 뿌려진 도넛 사진과 함께 미리 예약할 수 있다는 사이트 주소도 친절하게 올라왔다. 도대체 그 도넛이 뭐길래. 조금 더 손품을 팔아보니, 9월이 되면 사과 농장에서 지역 사람들이 사과를 직접 따갈 수 있도록 개방을 하는데 한쪽에서 사과 주스와 도넛을 같이 만들어 판다는 정보가 나왔다. 미시간에서는 가을이 되면 그 도넛을 꼭 먹어야 한다며.


주말을 맞아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사과 농장에 다녀왔다. 여름 내내 맑은 날이면 하늘에 양떼구름이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이 되어 있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조금씩 차가 밀리더니, 차가 길게 늘어선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에 온 뒤로 본 가장 많은 차들의 행렬이었다.


"이렇게 기다려서 도넛을 먹는다고?"


빨리빨리의 민족인 나와 남편은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냥 돌아갈까, 다른 농장을 가자고 해볼까, 아 미리 예약 주문을 해놔서 안 되겠구나. 우리는 말없이 음악의 볼륨을 높이며 도넛을 먹기 위한 기나긴 대열에 합류했다.


기다리다 보니 차 안에 앉아 농장과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들은 사과 주스와 도넛을 사러 주말에 농장에 오는 일이 일상인 듯 보였다. 이날은 차에서만 주문을 받고 있었지만,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온 가족이 사과를 따고 잔디밭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9월이 되면 쪽빛 하늘 아래에서 도넛을 먹으며 가을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는 하나의 연례 의식 같은 것일까. 여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공원으로 나가 일광욕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바베큐를 해 먹고, 가을이 오면 할로윈을 맞이해 대형 호박을 사다 잭 오 랜턴을 만들고,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를 차례대로 준비하는, 한 해를 보내는 순서들. 그렇게 계절에 맞추어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즐거워하고, 떠나보내고, 또 다가오는 날들을 준비하며 낯선 나라의 사람들이 한해를 차례차례 살아가는 방식을 생각하니, 도넛을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이들의 삶의 속도에 합승한 것 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와 도넛과 애플 주스를 먹다 보니 나도 이제 겨울을 준비해야 하나 싶다. 처음에 미국에 오자마자 소문대로 긴 미시간의 겨울을 보내다, 코로나 때문에 봄을 제대로 맞아보지도 못하고 여름이 오는 것을 보며 빼앗긴 봄 잃어버린 봄 이라며 분통해했었다. 그러다 좀 더 살아보니 미시간은 봄과 가을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5월까지 눈이 오다 갑자기 에어컨을 틀며 여름을 맞았는데, 벌써 밤에는 히터를 튼다.


아직 가을을 제대로 맞이하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온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일 년이 반토막난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나도 이곳의 속도에 맞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본다. 여름에 햇볕을 쬐며 걸었던 산책 코스와 남편과 함께 돌았던 자전거길에 단풍이 들고 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봐야겠다고, 밖에 나갈 수 있는 시간은 줄겠지만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 좀 더 추워지면 근처 몰에 가서 오너먼트를 구경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도넛을 가을에 꼭 먹어야 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가을이 온지도 모르게 겨울이 오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그렇게 에프엠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