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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나 Sep 22. 2020

나의 아이돌, 나의 언니들

팬심을 담아 적어보는 고백과 감사와 기도의 글





요즘 유튜브에서 <히든 싱어> 지난 시즌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살아남은 출연자들을 보면 어쩜 저렇게 가수와 똑같이 노래를 부르는지 감탄스러울 정도인데, 노래를 끊임없이 들으며 힘든 시절을 견뎠다며 가수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말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거려지면서 그들이 마침내 그 가수와 같은 무대에 섰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본다. 숨소리까지 따라 할 정도로 동경하던 오랜 우상과 마주 보고 노래를 부르는 기분은 어떨까. 생각해보니, 내게도 삶의 특정 구간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특징과 장점들을 모두 가져다 배우고 싶을 정도로 열렬히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언니들을 팬질했다.


첫 번째 언니는 중학교 시절 방송반 국장 언니였다. 흰 얼굴에 뿔테 안경을 끼고 늘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을 하고 있던 언니였는데, 첫인상과는 달리 기분이 안 좋아도 후배들에게 감정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어(여중여고 방송반에는 예민한 선배들로 가득했다), 시크함은 까칠함이 아니라 국장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카리스마라는 결론을 내리게 해주었다. 언니는 글을 참 잘 썼다. 책상에 무심하게 걸터앉아 유려하면서도 재치가 넘치는 글을 툭툭 써내는 모습을 보면서, 당시 중1이었던 나는 이 언니는 선배일 자격이 있으며 앞으로 나의 어른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취향 부자였던 언니는 팔짱을 끼고 뒤로 앉아 있다가도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열정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는데, 유희열 얘기를  때면  아낌없이 열광했고 '유시장님' 진행하던 음악도시 막방의 여운을   며칠에 걸쳐 표현했으며 최신 팝송 얘기가 나오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바로 씨디나 테이프를 빌려와 음악을 틀었다. 다양한 책과 잡지를 들고 다니며 음악과 대화 소리로 시끄러운 교실   크기의 방송실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읽었다. 나는 방송실  켠에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서 언니의 수다와 취향들을 부지런히 주워담았다. 밤마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 주파수를 맞췄고 하루키와 쥐스킨트의 소설들을 알게 되었으며,  때부터 씨디가 닳도록 듣기 시작한 토이, 이적, 김동률, 윤종신 앨범들이 나의 변치 않는 취향이자 나의 클래식이 되었다.


두 번째 언니는 대학 시절 동아리였던 검도부에서 만났다. 날 처음 본 동아리 선배들이 "어, 너 걔 닮았다!"라고 말했는데, 며칠 뒤 신입부원 환영식에서 영접한 그 선배는, 마음에 안 드는 점들 투성이에 매사에 서툴렀던 나와는 달리 안정되고 성숙한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모가 닮아서였는지, 선배는 나도 멋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 지름길처럼 느껴졌다. 어색해도 티 내지 않는 얼굴,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마음껏 웃어주는 성격, 차분하면서도 필요하면 가볍게 티키타카를 해줄 수 있는 센스와 늘 사람들의 중심에 있는 듯한 존재감에, 검도도 잘했다. 죽도를 들었을 때의 곧은 자세, 배를 잡고 웃다가도 대련을 시작하면 진지해지는 표정까지, 이토록 배울 점들이 넘치는 멋진 선배라니. 10대의 티를 벗고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던 내게 선배는 멋진 어른의 표본이 되어 주었다.


그 이후에도 나의 인생에는 많은 언니들이 다녀갔다. 대학원 시절, 수업 시간마다 모노톤의 옷들을 무심하게 걸쳐 입고 등장해 "통역은 바로 이런거예요"의 아우라를 온몸으로 발산하며 스타일 만큼이나 세련된 통역 스킬들을 마구 던져주셨던 교수님과,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조언으로 만성 사춘기 같았던 나의 20대에 단단해지고 싶은 마음을 선물해준 임경선님, 그리고 "흔들리는 중생님들아 이렇게 내공을 쌓으면 삶이 덜 힘들어져요"를 시전해준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김도인님까지.


또한 삶이 권태롭다고 느껴질 때마다 김연아의 영상을 찾아 봤고, 취미 발레에 빠진 이후로는 발레리나들의 오랜 시간 자신을 단련하는 꾸준함과 그 부단함의 상징처럼 곧게 뻗은 아름다운 등 라인을 동경했다. 요새는 밀라논나 할머니의 유튜브를 보며, 치열한 젊은 날을 보내고 모든 걸 고요하게 내려놓은 그녀의 이유 있는 여유로움과 정갈함을 눈에 담는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두리번거리던 인생 1회 차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준 그녀들을 생각해보며, 그 시기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학창 시절에는 좁은 소도시와 학교로 인한 답답함을 라디오과 글, 음악을 통해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며, 20대 초반에는 아직 서투를지라도 태연한 얼굴로 대처할 수 있는 어른의 모습이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보다 한 발 앞서 삶을 살아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한 걸음 더 힘 있게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리라.


<히든 싱어> 출연자들처럼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문물에 귀를 열어가던, 더 지혜로워지고 싶어하던, 때로는 고군분투하던 나의 지난 모습들과 기억들이 그 시기 동경하던 그녀들과 함께 켜켜히 쌓여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에 함께 있어준, 아이돌만큼이나 멋졌던 나의 언니들.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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