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행복을 선택하다
작은 것들을 위한 찬양
팬데믹을 겪는 동안 이동식 침대를 쓰기 시작했다. 매번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매트리스를 한쪽으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24시간 침구가 차지하는 공간은 반 이상 줄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나면 포트에 물을 올리고 세탁실을 비롯해 집안 곳곳 내 손이 필요한 곳을 터치하며(마치 영화나 광고의 한 장면처럼 손만 갖다 되면 해결되는 상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거실과 주방, 방 밖으로 통하는 모든 창문을 연다. 겨울이라도 예외는 없다. 밤새 앉은 먼지를 거두는 데는 부직포를 끼운 대걸레질만 한 게 없다. 흩어지거나 늘어져있던 것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자극을 주고 나면 뜨거운 물 반잔에 찬물 반잔을 섞어 잠시 책상에 앉는다. 지난밤에 세운 계획이 오늘 내 기운에 잘 맞아 움직일 수 있도록 점검하고 각인한다.
고구마요리;전날 늦은 저녁 무렵, 몇 사람 손을 거쳐 내게 온 고구마를 봉투 그대로 조리대 위에 올려두고 주방 하루를 마감했었다(이 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주방이 독립공간이란 거였는데, 눈에 보이지 않으면 큰 불편 없이 일을 미룰 수 있다).
엄지손가락 두 배나 될까 말까 한 고구마를 까야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집 냉동실에 꽉 채워진 음식 중 하나였다. 사료로 처분함직한 크기의 고구마를 알밤처럼 까서 찌고 적당히 말려서 이중포장했는데 꽤나 비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10초만 돌리면 쫄깃하고 부드러워 음료와 곁들여 먹으면 아주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되었다. 그걸 만들어보려 한 건데 만만치 않았다. 일단 고구마의 얇디얇은 껍질이 어떤 종류의 칼도 잘 먹히지 않았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 스무 개 남짓한 고구마를 까서 찜솥에 찌고 오븐에 구워서 보관용 지퍼백에 담고 나니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그중 모양이 둥글고 커서 찜기에 들어가기 어중간한 것들은 적정 크기로 잘라서 고구마밥을 만드는 데 썼다. 두둑해진 일용할 양식들을 보면서 감사해야 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파김치 담기;친구와의 약속시간에 너무 일찍 나서서 늘 지나치기만 했던 가평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정작 시장에서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입구 쪽에 세워둔 트럭에 탐스럽게 쌓인 파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대파부터 쪽파까지 한 묶음묶음이 일반 마트에서 달랑 잘라서 가지런히 담아놓은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굵고 탐스러웠다. 흙투성이 쪽파 두 단을 겁 없이 사서는 주방 다용도실에 사흘째 방치해두고 있었다. 쓰레기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신문지를 깔고 파뿌리를 툭툭 잘라두고 다듬기 시작했다. 김치냉장고에는 작년 김장 때 넉넉하게 만들어 딸들에게 나눠준 믿음직한 엄마표 양념이 있었다. 찹쌀풀을 끓여 매실액과 설탕, 젓갈을 조금씩 더 넣고 버무렸다. 맛은 엄마가 한 것에 비할 수 없지만 제법 그럴듯한 파김치가 만들어졌다. 몇몇사람들을 떠올리며 반찬통 다섯 개에 똑같이 나눠 담았다.
독후감 쓰기;억지로 했던 기억밖에 없다. 이제는 굳이 할 필요도 없다. 아득하게 잊혀진 단어, '독후감'인데 이번만큼은 쓰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 나만의 감상문을 쓰기 위해 두 가지 관점으로 한번 더 읽을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리고 책 속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 나는 피터비에리가 소설가보다는 언어(철)학자여서 이 소설이 탄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여행의 동기도 언어였다) 책 속에 나타나는 언어학자적 표현을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왜 모두가 그레고리우스를 좋아하는지(영화에 나오는 제레미 아이언스를 생각하면 안되는데) 그의 매력(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진정성)은 무엇인지 탐구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나는 마음껏 행복해지기.
소통하기;자정이 다 되어 J에게 문자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인가?(이 시간이 아니면 조절 안 되는 에너지가 생기기나 하겠나?ㅎㅎ) 요즈음은 늦게 자는 날이 없는데 간혹 이런 날이면 괜스레 앞으로 살아갈 일이 아득하니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지나온 날에 죄지은 자들에게 참회하고픈 마음도 일어나니.... 곧 죽을 날이 온 건가?"
"누구나 곧 이윽고 언젠가 죽을 날이 오지. 나의 우주는 사라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우주가 태어나겠지. 그렇게 억겁의 시간 동안 수없는 우주가 생성과 소멸의 윤회를 하였으리라. 곧 해가 뜬다. 오늘을 살아가세"
역시 그였다. 우문현답으로 나의 불안함을 한 방에 해소시켜 주었다. 그는 아직 미완이긴 하지만 내 중편소설 <날개가 있으면 날아야지(가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친구다. 문득 일어나는 상념을 보내면 직접적이고 정확한 답을 주는 무명의 사상가이자 문장가다. 이런 친구가 곁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새벽 4시에서 30분 사이에 일어나 편두엽을 안정화시키고 전전두엽을 활성화시키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요가 동작을 포함한 108배와 명상은 매일 나의 몸에 투여하는 고농축 영양제다.
매 순간 내 몸과 마음이 선택하는 것. 그것을 하는 것, 바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