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집 정리"에 관한 채널을 보다가 제일 먼저 정리할 것이 '오래된 책'이라 서두를 시작 하길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채널 구독을 끊어버렸다. 더구나 그 유튜버는 실용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번 읽으면 끝이니 정리하라고 했다. 책에 대한 철학이 조금도 없는 사람이라 결론을 낸 것이다.
한동안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처음 내 서재가 생겼을 때 부산 친정에 있던 대학교 전공서적까지 바리바리 싸서 택배도 하고 몇 차례에 걸쳐 직접 실어왔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수입이 좋았던 나는 복사와 제본이 발달했던 당시에도 대부분의 전공서적들을구입해서 썼다. 그 책들을 예쁜 포장지로 씌우고 비닐까지 덮어서 목록을 만들고 도서관처럼 찾아보기 표에다 코드번호를 매겨서 분리 정리를 해두었었다. 책이 꽂혀있는 책장은 보는 것만이라도 뿌듯했고 간혹이라도꺼내보며 추억도 지식도 다져지는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딸이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이사를 하게 되면서 3천 권이 넘는 책을 고물 삽니다 아저씨를 불러 정리할 때 종이값조차 받지 않았던 건 그 책들에 대한 내 마지막 애정표현이었고 예의였다
책이 재산이란 말을 공감하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너무도 많은 책들을 버렸고 후회할 때가 많았다.
며칠 전에도 2019년 발간된 유시민의 <유럽 도시기행 1> 파리 편을 읽다가 연관 기록들을 찾는 과정에서 책장 아래 한켠에 꽂혀있는정석범의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 문화기행>이란 책을 발견하고 다시 차분히 읽으면서 작가의 세계에 흠뻑 빠지는 쾌감을 맛보았다. 동시에 버려진 책들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났다.
유행 지난 옷도 그 유행이 돌아오면 생각나는데 하물며 책은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아련하게 지워지질 않았다.
정석범의 책은 2005년에 출판되었고 그즈음 구입해서 읽다가 2008년 "장흥 어느 방파제에서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다시 읽기 시작한다."라고 첫 장에 기록되어있었다.
정독만이 독서가 아니고 책을 산 즉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도 쉽지 않다. 남독(넓게 두루 읽음)이나 계독(분야별 관련 독서)도 전체를 읽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경우도 있지만 나처럼 2005년에 읽었던 책을 2008년에 읽다가 2021년에 다시 꺼내 읽고 그의 저서를 추가로 구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오래된 책이라도 장소만 허락한다면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소위 고전이라고 말하는 책들은 그때그때 다른 감동을 준다. 내 처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감동이 다르다. 인문서적만 그러랴?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때 베스트셀러라 구매했지만 도무지 의미를 모르고 읽었던 것들이 수십 년이 지나 읽었을 때 살을 후비는 감동을 느낀 적도 많았다(물론 그런 책들은 또 그럴싸한 편집으로 재발행되지만 그때 그 시절 구입하지 않았다면 찾아볼 기회도 없었겠지).
2021년 정민 교수님의 신간이 반가워서 구매했는데 어딘가 비슷한 문구가 생각나서 책장을 뒤졌더니 역시나 2005년판 <죽비소리>라는 그의 책이 있었다.
내가 부족하다는 걸 알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면 내가 얼마나 지덕이 모자란 줄을 알게 되고 그러면 스스로 반성하여 공부한다.
고전 독해서를 읽다가 사상가인 도올 선생에 반하여 중국 일기(사진이 많아서 대리 만족하기에도 딱 좋다) 세트도 샀다. 대충은 훑었고 두고두고 읽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