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록달록해진다는 건

by 은진

"넌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면 속 동은의 대사 앞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렀다. 비아냥거리는 재준을 향해 던진 그 서늘한 얼굴. 그건 단순히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오래 눌러둔 것이 가만히 고개를 들 때 비쳐 나오는, 지독하게 투명한 얼굴이었다.


그 서늘한 투명함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비슷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늘 타이밍을 놓쳤고, 막상 입을 열려하면 목소리부터 작아졌다. 끝내 뱉지 못한 말들이 안으로 고여만 갔다. 화면 속 그 거침없는 동은을 보니 조금 시원했고, 또 조금 부러웠다.


학창 시절, 내 이름 뒤에는 늘 '착하다'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때는 그 말이 나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역할 같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착하기보다 거절하는 방법을 몰랐던 쪽에 가까웠다. 웬만하면 웃어넘기는 게 편했고, 괜히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화를 안 내서 좋더라" 같은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작아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밟았다 해도 화를 내지 말아야 할 것만 같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다른 반응들이 지워지는 게 싫어 떨쳐내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그 시절의 나와 그때 일들이 하나둘 생각났다. 그 시절의 나는 "그건 너희 생각일 뿐이야."라는 말을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말하기도 전에 이미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는 착한 이미지 틀을 깨는 게 왜 그리도 버거웠는지, 이제야 그 시절의 나를 가만히 다독여본다.


졸업 후, 우연히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마흔이 넘은 서로를 단숨에 알아보곤 우린 반가워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너,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은 그 말에 일단은 고맙다고 받아넘겼다.

예전 같으면 내 모습이 어디 이상했나 싶어 속으로 되짚어 살피겠지만, 이제는 나의 변화가 누군가에게 읽힐 만큼 선명해졌구나 싶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나의 어떤 모습에서 변화를 읽어낸 걸까. 굳이 묻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다만 내 과거를 기억하는 이가 감지한 그 변화가, 나에게는 꽤 기분 좋은 긍정으로 다가왔다.


드라마 속 재준은 동은을 보며 예전에는 흑과 백이었는데 꽤 알록달록해졌다고 말한다.

동은의 색이 오래 눌러온 감정이 만들어낸 선명함이라면, 내 색은 훨씬 느리고 사소하게 번진 쪽이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달라진 것이다.


사실 동은과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서늘한 선언이 내 마음을 두드린 건, '내 고유의 색을 타인이 결정하게 두지 않겠다'는 그 단단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 지점에서만큼은 나도 그녀와 닮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 의지는 극적인 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이것저것 겪어내는 사이 시간이 나를 조용히 키워놓았다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도, 마흔도 훌쩍 지난 요즘이다. 지금은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내키지 않는 부탁에는 전처럼 웃으며 넘기지 않는다. 오래 망설이지도 않는다. 마음이 기우는 쪽을 택한다.


"넌 모르잖아, 내가 지킨 이 알록달록한 세상." 그 말을 혼자 중얼거려 본다. 몇 번쯤 되씹어 보면, 완전히 내 말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밀어내고 싶지도 않다.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내면의 목소리를 글로 옮긴다. 때로는 사람을 만나는 모임에서 얻는 활기보다, 글자로 선명해지는 나를 마주하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있다. 가끔은 베란다 정원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내 의지로 채워가는 시간이라 좋다. 고르게 채워 넣는 이런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삶도 조금씩 다른 색이 되어가겠지.

동은의 그 말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굴려보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