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침대와 파란 의자 사이
늦은 시각에 전화벨이 울렸다. 시아버지가 피를 토하셨다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날아왔다. 통화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이미 굳어 있었고, 구급차 소리가 다급하게 섞여 들어왔다.
폐에 피와 물이 차서 빼내야 한다며 입원 수속을 밟고 있다는 소식이 다시 왔다. 한숨 돌렸으니 걱정 말라는 시어머니 연락에 우리는 다음 날 찾아가기로 했다. 밤새 그 일을 홀로 감당했을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부랴부랴 찾아간 병실은 소독 냄새 대신 눅눅한 습기가 먼저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슷한 나이의 노인들이 침대마다 누워 있었고 그 곁에는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워 있는 사람과, 그 곁을 지키는 사람. 같은 모습이 병실 안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곁으로 옮겨갔다.
하얀 시트 위에 누운 아버지는 생각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고비를 넘긴 탓인지, 환자용 침대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보였다.
반면 바닥에 낮게 놓인 파란 보조의자 위에서 시어머니가 인기척에 그제야 눈을 뜨셨다. 밤새 좁은 의자에 담요 한 장을 의지해 몸을 구겨 넣었던 탓일까. 푸석하게 내려앉은 피부 위로 굵은 주름과 검버섯이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하얀 침대와 파란 보호자용 간이 의자가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한쪽은 편안하게 몸을 맡긴 자리였고, 다른 쪽은 밤새 몸을 구겨 넣어야 했을 만큼 좁고 딱딱한 자리였다. 얼굴만 보면 누가 환자이고 누가 보호자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어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쉬셨다. 정신이 없어서 본인 약인 줄 알고 누워 있는 양반 이름으로 된 약을 잘못 드셨다고 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며 허탈하게 웃으셨는데, 그 웃음은 간밤의 소동을 털어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몸짓 같았다.
그때 침대 쪽에서 기력은 없어도 고집만은 여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을 필요 없어. 빨리 퇴원하자고."
어머니는 좀 전과 전혀 다른, 톡 쏘는 말투로 바로 받아치셨다.
"이 양반이 또 큰일 날 소리만 하네. 의사 선생님이 허락해야 가는 거지!"
아버지는 주삿바늘이 꽂힌 옆구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불편하다며 투덜거렸다. 다인실 병동의 텔레비전 소리,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밤새 시달려 도저히 못 있겠으니 집으로 가자고, 파란 의자에 앉은 어머니를 계속 종용했다.
어머니는 그 불평을 다 들으면서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일어나 세면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수건을 적셔왔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주고, 물기가 남지 않게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수염도 밀어야겠다."
우리에게 면도기를 가져오라고 했다. 계속 투덜거리는 아버지를 나무라면서도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약으로 버티는 남편을 요양병원에서 치료하는 대신, 기어이 자신의 몸을 깎아 그 자리를 지켜왔다.
잠시 병실의 침대 곁을 떠나 어머니와 단둘이 휴게실에 앉았다. 세로로 긴 창으로 오후 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작은 공간 안에는 텔레비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고,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유리문 너머로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좀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셨다.
"괜찮은지도 모르겠다. 병원에 있으니까 내가 먼저 죽을 지경이야."
한참을 말없이 계시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이셨다.
"차라리 얼른 죽었으면 좋겠어."
휴게실 바닥에 내려앉았던 볕은 어느새 한 뼘쯤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의 풍경은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보조 의자에 앉아 남편의 배액 주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손 닿을 거리에서 한 사람은 아프고, 한 사람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예정보다 사흘 앞당겨 퇴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머니는 내내 말이 없으셨다. 차창 밖으로 봄이 오지 않은 썰렁한 논과 밭들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아버지를 자리에 눕히고, 잠시 뒤 먹기 좋게 잘라낸 바나나를 곁에 놓았다. 아침도 제대로 못 드셨을 거라며, 그 옆에 앉으셨다. 바나나를 한 조각씩 집어 드시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침대와 의자 사이에서 누군가를 먹이고, 닦아주고, 지켜내는 어머니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