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지 않아서 보였다

by 은진

그런 사람이 있다. 어디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중심이 되는 사람. 같은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만치 앞서 있는 사람.


H를 만난 건 첫 직장에서였다. 그녀는 의사표현이 분명했고, 쾌활한 에너지로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그해 학교는 예기치 않게 연구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유난히 분주했다. 모든 직원이 쉴 틈 없이 회의를 이어갔고, 회의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계획에 없던 새로운 업무를 맡는 일은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침묵이 흐를 때마다 "제가 하겠습니다!"라며 주저 없이 손을 드는 건 언제나 그녀였다. 상사들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역시 H 선생이야, 시원시원하네." 그 한마디가 딱딱한 회의실을 부드럽게 채웠고, 그녀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반면 나는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밖으로 밀어내기보다 안에서 여러 번 굴려야 비로소 입을 떼는 쪽이었다. 조금 더 고민하고 살핀 뒤 결정하고 싶었지만, 그러는 사이 기회는 번번이 달아났다. 입안에서 맴돌던 문장들을 소리 없이 삼키는 날이 많아졌다.


열정이 필요한 자리에서 그녀는 늘 망설임이 없었다. 그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같은 발령동기가 아니었다면 마음이 덜 복잡했을까. 그녀가 더 또렷해질수록 나는 자꾸 뒤편으로 물러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다정함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먼저 말을 걸고, 챙겨주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사람. 차라리 날카롭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깔끔하게 질투라도 했을 텐데. 미워할 이유조차 찾지 못해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무덤덤한 척 굴었다.


회식 날로 기억한다. H는 상사가 권하는 술을 망설임 없이 받아 들었다. 그 옆에서 나는 차마 술을 못 마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잔을 들었다. 속이 뒤집히는데도 웃으며 잔을 비웠다. 누군가 "한 곡 해야지!"라고 외치는 순간,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화장실 수도꼭지를 틀고 한참이나 물을 흘려보냈다. 거울 속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있었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사람 같았다.


나는 H처럼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지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으려 버둥댔던 그 시간들이, 처음부터 나의 모양이었다는 것이 그제야 보였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선배들 사이에서 동기인 그녀가 그래도 가장 편한 상대였다. 그녀라는 거울 곁에서 나는 내가 어떤 모양의 사람인지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빠르게 손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선을 두는 곳도, 옷을 고르는 기준도, 말을 꺼내는 타이밍도 달랐지만, 고민이 생기면 우리는 서로를 찾았다. 그녀는 늘 빠르게 답을 내놓았고, 나는 언제나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먼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떠난 쪽은 그녀였다. 곧이어 결혼 소식도 들렸다. 결정도, 발령도, 결혼도 언제나 나보다 한 발 빨랐다. 애초에 그녀는 내 경쟁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보색은 색상환에서 정반대에 위치한 색이다. 빨강과 초록, 파랑과 주황. 나란히 놓이면 서로를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게 우리였다.


가끔 그녀가 생각난다. 여전히 가장 먼저 손을 들며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을까. 안 봐도 눈에 선하다. 다만 아주 가끔, 누군가 기세 좋게 손을 드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움찔한다. 그럴 때면 그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