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말고

《1417년, 근대의 탄생》을 읽고 / 스티븐 그린블렛, 이혜원 옮김

by 은진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데 더 열중할 때가 종종 있다. 책장에는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책들이 쌓여간다. 그래도 서점에 가면 또다시 책을 들고 만다.


대형서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베스트셀러 코너다. 세련된 표지, 유명인의 추천사,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 마치 책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다. ‘이 책을 읽어야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무언의 압박마저 느껴진다.


인터넷 서점은 더 간편하다. 검색 한 번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주문 완료. 하루 만에 책이 문 앞에 도착한다. 너무 쉽고 빠르다.

그러나 1417년, 포조 브라촐리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그는 먼지 쌓인 수도원의 서가를 뒤지다가 낯선 필사본을 발견한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잊힌 지 오래된 책. 하지만 그는 단숨에 알아봤다. 이것이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시대를 바꿀 책이라는 것을.


그 책은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다. 신이 세상을 주재한다는 믿음이 흔들릴 수조차 없던 시대에, 원자론을 이야기하며 신의 개입 없이 세상이 움직인다고 주장한 책. 너무 앞서간 나머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포조의 발견 덕분에 다시 세상에 나왔고, 이후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 사상의 초석이 되었다.


포조는 어떻게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봤을까? 그는 단순한 책 수집가가 아니었다. 수도원의 서가를 뒤지면서도 아무 책이나 무작정 집어 들지는 않았다. 필사가로 살아오며 수많은 고전을 손으로 옮겨 적었고, 그 경험이 곧 그의 안목이 된 것 같다. 포조에게 책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사유의 집합체였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꽂이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하지만 포조처럼 책의 가치를 꿰뚫어 볼 자신이나 능력이 없다. 여전히 화려한 광고와 추천 문구에 끌려 서점 앞에서 망설인다.


검색만 하면 인기 순위와 독자 리뷰까지, 책을 고르는 정보는 차고 넘친다. 그렇게 손쉽게 책을 찾다 보니, 정작 내 시선에 닿지 않는 책들이 많아졌다.

아직 주목받지 못한 책.

서점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책.
누구도 리뷰하지 않은 책.
나는 그런 책들을 지나쳤다. 그러니 안목이 생길 리 없다.


포조가 발견한 책은 그의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그런 책사냥꾼이 있기에 우리는 과거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서점 한쪽에 조용히 놓인 책들 중에도, 시간이 지나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책이 될 작품이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내가 고른 책이, 훗날 또 다른 독자의 손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은 화제의 책이 아니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책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고서가 가득한 서점 내 모습(삼례, 정직한 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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