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기억 찾기

by 은진


그날, 나는 오랜만에 엄마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시래기나물, 호박나물, 고사리나물을 한참 동안 물에 불리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오래도록 삶았다.

병원을 퇴원하고도 엄마는 정말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 입맛을 잃은 것인지 그 좋아하던 전복죽을 앞에 두고도 숟가락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다 마트에서 우연히 대보름 음식 재료를 보고서야, 그날이 대보름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쫀득한 찹쌀밥과 씹을수록 고소한 나물, 엄마가 정성껏 차려주시던 밥상이 떠올랐다. 싱싱한 봄동과 나물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이것저것 장을 보는 내 모습이 낯설었는지, 남편은 놀란 듯 바라보다가 곧 도와주었다.


나는 요리에 흥미가 없는 편이다. 사람들이 왜 요리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일부러 챙겨보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은 우리 아이들은 늘 같은 반응을 보였다.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언제나 '건강한 맛'이라고 했다. 어쩌면 맛이 없다는 말을 돌려 한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아침은 간단히 해결하고, 점심은 직장에서, 저녁은 배달 음식으로 때우는 날이 많았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의 맛’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달걀찜과 달걀볶음밥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게 다행스러운 건, 어릴 적 엄마 곁에서 나물을 무치고 볶던 모습을 유심히 본 것이다. 머릿속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액젓에 마늘과 고춧가루, 그리고 들기름이 어우러지자 엄마가 만들어주던 바로 그 나물 났다. 내 기억 속 냄새와 점점 닮아갔다.


침대에 누워 계시던 엄마가 냄새를 맡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셨다. 자세를 고쳐 앉아 한참을 가만히 계시더니,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식탁 쪽으로 발을 옮기셨다.


"보름 음식이네. 오랜만이다."

얼굴에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맛을 다시 찾은 듯한 기대감이 서렸다.

"네가 다했어? 음식은 하다 보면 늘어."

엄마는 천천히 나물을 집어 한입 드셨다. 그리고 한참을 꼭꼭 씹더니, 말했다.

"정말 맛있어!"

그날 이후, 엄마는 식사 때마다 내가 만든 봄동 겉절이와 나물 요리를 드셨다. 입맛도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요즘, 엄마의 기억이 어딘가로 자꾸 숨는다. 자신도 찾지 못하겠다고 하시면 안타깝다.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 않아도, 금방 있었던 일을 또 묻고 다시 묻는다.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왜 자꾸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음식에 대한 기억은 유난히 오래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음식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시, 식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밥 먹을래?"라며 묻곤 하신다.


음식 과학자 해럴드 맥기(Harold McGee)는 그의 저서 『On Food and Cooking』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각과 후각은 가장 원시적인 감각이며, 감정과 기억을 직접 연결하는 유일한 감각이다."


맥기의 말을 떠올리면, 미각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을 깨우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는 봄동과 나물의 맛이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더듬게 만들었다. 덕분에 쥐불놀이와 외갓집 추억을 떠올리고, 잠시나마 행복감에 젖으셨다.


그날 내가 만든 음식은 특별하지도, 썩 뛰어난 맛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젓가락은 팥밥과 나물을 쉴 새 없이 오갔다. 기억은 머리보다 혀끝에서 먼저 깨어나는 듯했다.


이번 정월 대보름을 계기로, 나는 엄마를 위한 음식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음에는 엄마가 좋아하시던 수제비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반죽을 치대고, 멸치 육수를 우려내며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을 다시 살리고 싶다. 엄마가 다시 한번 "이거 아주 맛있네!"라고 말해주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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