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척하지만 느껴진다

by 은진


불쑥 들어온 목소리. 짧은 답장 속의 단어 하나, 빠르게 스친 눈빛.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것들인데, 나는 그런 것들이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어도, 먼저 불편함이 밀려온다.


그날도 그랬다. 조용한 버스 안,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쏠렸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곧바로 긴장이 뒤따랐다. 몇몇 승객들의 뒤척이는 소리와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온 대화가 멀리 있어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런 나와 달리, 옆자리 승객은 그 시끄러운 상황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눈을 감고 평온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낯설 만큼 태연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순간, 나의 반응이 과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왜 나는 이렇게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일상에서 자주 고개를 드는 이런 예민함이 불편했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 나는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 책상을 두드리는 손끝 하나까지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아이들이 보내는 신호가 내 눈에 분명히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어떤 감정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에 보인다고 해서 쉽게 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조심스레 다가가야 했고, 어떤 날은 말없이 기다려야 했다. 똑같은 상황은 없었고, 같은 방식이 통하는 법도 없었다.

상담교사도 아닌 내가 그런 뒤엉킨 감정들과 온전히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족함을 채우고자 상담을 공부했지만, 이론만으로는 사람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걸 곧 깨달았다.


진심으로 한 말이라도, 준비되지 않은 위로는 상처로 돌아오곤 했다. 아이를 위해 건넨 한마디가 오히려 마음을 닫게 만든 순간도 있었다.


그런 아이 중 하나가 J였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나는 그의 눈빛과 자세에서 어떤 느낌을 감지했다. 예민한 감각은 그런 순간에 먼저 반응했고, 나는 주저 없이 개입했다. 복도를 지나던 어느 날, J를 향해 낄낄거리는 남학생들과 마주쳤다. “너희, 이 친구한테 왜 그러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나는 J의 말없는 감정에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잘해보려는 의도였지만, 마음을 쏟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감지한 신호에 진심으로 응답했지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진 않았다.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 오히려 아이에게는 부담이나 상처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때 잘못된 걸 알았다. 때로는 개입보다 조용한 기다림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동안은 모른 척하려 애써보기도 했다. 예민한 반응이 오히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모른 척하며 지나치는 일은 오히려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무 일 아닌 듯 웃어넘기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감각 덕분에 놓치지 않았던 순간들이 많았다. 지나친 개입이 깊은 후회를 남기기도 했지만, 어떤 순간에는 내 손길을 기다리던 아이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약 15%에 이른다고 한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이 되었다. 그동안 혼자만 유난한 줄 알았던 감정들이 조금은 덜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인 척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애써 무심한 얼굴로 넘기기보다는, 내 방식대로 세상을 느끼고 반응하면 된다. 그 감각 덕분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예민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나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