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 15
카카오스토리를 또 열어 보았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이 사진이 가득한 나의 보물창고, 절대로 없어져서는 안 되는 그 안에는 사진뿐만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최근 몇 년 전까지의 기록이 빼곡하다.
나는 아직도 꽤 자주 그곳을 들락거린다.
덕분에 그 모든 날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고 생생하다.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내가 아이를 꼭 안고 다소 격하게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아이가 네 살 때의 일이다.
할아버지가 사주셨다는 커다란 자동차를 손에 쥐고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더랬다.
"엄마, 그 옷 당장 벗어! 패션이 아니야!"
웃기는 녀석이다.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휴일(근로자의 날)이었다. 남편은 일이 있어 느지막이 출근을 하고, 무료해진 나와 아이는 차를 타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이 무렵 우리는 카페에서 파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빠져있었다. 평소에는 단 간식을 잘 주지 않았지만 가끔 이렇게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으면 그게 또 아이에게는 입이 귀에 걸리게 행복한 시간인 거다.
카페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집에 가려는데, 아이가 스티커를 사러 서점에 가자고 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서점이라니 얼마든지 환영이다.
아이에게 서점은 문구점 비슷한 곳이었다. 서점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거리가 생각보다 많다.
걸어서 5분,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네 살 아이와 잠깐의 산책을 즐기기에도 딱 좋은 거리다.
손을 꼭 잡고 그 짧은 거리를 느긋하게 즐겼다.
이것저것 구경하기를 한참, 아이는 스티커를 하나 골랐다. 그것을 소중히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다시 엄마손을 잡는다.
다시 떠올려봐도 참 완벽한 순간이다.
거기까지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곧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주차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다, 균형을 잃고 다리를 삐끗한 순간 '빡'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저앉았다.
얼마간 넋이 나가 있었던 것 같다.
상황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아이랑 함께여서 더 당황스러웠다.
고개를 드니 트럭에서 음료박스를 내리던 아저씨 한 분이 보였다.
'아, 저 박스 내리는 소리였구나.'
라며 애써 긍정회로를 돌려본다.
그래도 움직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소리의 출처가 어디인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19에 전화를 걸었다. 정신이 없던 내가 위치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편의점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셨던지 아주머니 한 분이 달려 나와 도움을 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이다.)
구급차에 타서도 아이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많이 놀랐는지 울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숨죽이고 있는 아이 모습이 마음 아팠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아프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시댁은 너무 멀었고, 친정은 한 시간 거리였으나 엄마도 몸이 약하셨기 때문에 부탁을 드려도 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친정에 말씀을 드리고, 남편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구급대원님이 전화를 넘겨받아, 상태를 보니 부러진 건 아닌 것 같다며 너무 걱정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온통 아이 걱정에 통증을 자각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그렇게 판단하셨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오답이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통증이 미친 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CT를 찍으면서도 너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더니 검사를 진행하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네... 아프시게 생겼네요."
골절. 그것도 중족골이 무려 분쇄골절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음날 수술을 받기로 한다.
아이를 친정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보내고, 남편은 병실에 남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울리는 전화벨소리, 수화기 너머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 번도 엄마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아이가 힘겹게 울고 있었다.
아빠와 잘 놀다가도 잘 때면 꼭 엄마와 함께여야 하는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셔서 즐거웠던 낮시간을 지나 밤이 되자, 엄마의 부재를 의식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이는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를 병원에 두고 왔어! 엄마 데리러 가야 돼!"
아... 지금도 마음이 미어지는 소리다.
엄마가 없어 불편한 게 아니라, 두고 온 엄마를 걱정하고 있었다.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달래도 달래 지지 않았기에 남편을 급히 집으로 보냈다. 한쪽 발을 쓸 수 없어 혼자 있기엔 무리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새끼 그만 울었으면 싶었다.
사람이 급하면 슈퍼파워가 나온다고 하던가, 그 밤 나는 혼자서 통증을 견디고 화장실도 혼자서 잘 다녀왔더랬다.
다음날 아침 수술장에 들어가기 전, 아이와 통화를 하고 싶었지만 곤히 자고 있다고 하니 깨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 두려웠다.
만에 하나 다시는 못 보게 되면 어쩌나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참 바보 같지만 그때는 그랬다.
내가 계속 울자 선생님들이 달래신다.
정말 잘하는 교수님이라며, 수술 잘 될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환자분, 진정하세요. 재워드릴게요."
글을 쓰며 또 눈물바람이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아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그 어린것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막아볼 겨를도 없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나고 만다.
며칠 뒤, 우리는 병실에서 아이의 생일 파티를(파티라고 해봐야 케이크에 불을 붙이는 정도였지만)했다. 생일 축하 노래를 직접 불러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감사했는지 모른다.
엄마가 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간 아이는, 그 뒤 며칠간 친정에서 삼촌과 할머니 할아버지와 잘 지내주었다. 난리를 한 번 겪으셨던 엄마는 밤마다 조마조마했다고 하셨지만 말이다.
참, 서점에서 구입했다던 그 스티커는 허무하게도,
엄마! 스티커가 떨어져떠요!
응급실 화장실 바닥에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