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Place 마음껏 읽을 작은 도피처
“살아보니 중요한 건 하나도 없더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정작 중한 게 아니었어. 다 지나가는 일들에 매 순간 무겁게 지내지 마. 넓게 봐. 갇혀있다 보면 자꾸 사람이 좁아져.”
바쁘단 핑계로 사흘 만에 들은 엄마의 목소리에 또 걱정이 묻어있다. 매사에 진지한 딸이 혹여 타지에서 혼자 무언가를 감내하고 있을까 애가 탄다. 단순과 경쾌가 삶의 모토이지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에 집중하다 보면 찾아오는 모든 순간은 적이 되고 유머도 여유도 없는 회색 인간이 된다. 변수를 경계하는 삶은 너무나 무겁고 어려워서 에라 모르겠다, 마구잡이로 삶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모른척하고 싶다. ‘도망치는 것도 꽤 괜찮잖아, 도망치자!’를 택하다가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도망친다면 남아있는 나의 책임감과 신뢰감은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하며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사명감 따위 없이 아무렇게 망가지고 싶다고 외치지만 그 마음 꼭꼭 접어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 도태되지 않도록 발맞춰 움직이던 출근길. 활자 중독자처럼 늘어놓던 병렬 독서 중 하나를 떠올린다. 얼른 오늘의 책을 읽어야지. 조금 일찍 도착한 책상에 앉아 한 명의 이야기를 읽어야지. 그렇게 잠깐 살아야지. 그렇게 잠깐 숨을 좀 쉬어야지. 그리고 퇴근 후엔 아무도 없는 공간에 숨어야지. 꼭꼭 숨어 마음껏 읽어야지. 종일을 도망쳐 살 수 없으니 작은 도피를 채워 남겨진 나를 위로해야지.
➊김포 책잎 @bookleaves_official / 시간과 문장을 수집하는 공간
살아온 터전을 옮겼을 때 계절을 겪으며 마음을 둔 공간에 모두 안녕을 고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올라온 김포행에 한동안 정처 없이 떠돌았던 지난날. 책잎 오픈 소식에 달려가 한참을 머물렀다. 계절에 맞게 큐레이션 된 책과 문장, 씁쓸하고 달큰한 차와 표지마다 쓰인 손 글씨, 책장 사이사이 비집고 튀어나오는 귀여운 얼굴들. 아아- 배회하던 마음 둘 곳이 드디어 생겼다. 새로운 터에서 흐르게 될 시간과 문장의 모든 틈에 책잎이 있길. 예약된 시간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오래오래 있어 주세요.
➋전주 스틸라이프 @_stilife / 조용함을 그리는 공간
새벽 퇴근과 조기 출근을 반복하며 잘 해내고 싶던 날들. 잘하고 싶던 욕심과 별개로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던 날. 이대로면 망가지겠다 싶어 도망친 낮, 산책하던 골목 어귀에서 만난 새하얀 공간. 이곳이라면 꼭꼭 숨을 수 있겠다. 넓지 않은 공간에 적당히 거리감으로 배치된 의자와 테이블. 그림을 그리는 사장님을 뒤로 크게 틀어진 음악에 잠시 등을 기대 본다. 몸을 감각하며 큰 숨을 고른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뭐든 해볼 수 있겠다. 생각을 끄적이는 일도, 책장을 넘기는 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일도. 침묵은 미덕, 고요는 필수가 되는 곳. (단체 회식에는 미분당. 그리고 2차는 스틸라이프를 추천해 드립니다.)
➌속초 루루흐 @cafe_ruruq / 각자가 되는 공간
빽빽한 스케줄 사이 급하게 몸을 일으켜 훌쩍 도망쳤다. 잠시 생각은 멈추고 가만히 있어 볼까. 그래도 충분하잖아. 도망자의 완벽한 도피처였던 루루흐. 고양이, 디자인, 건축, 문학 칸칸이 나뉜 책장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왜 이토록 완벽한지 깨닫게 된다. 섬세함으로 가득 찬 공간을 만나면 살고 싶어 진다. 어디론가 향하고 싶을 때마다 밥 먹듯 출근하고 싶은 곳. 그럼 그날은 좀 살아난 의미가 있겠지. 소개된 문장과 향들, 배치된 조명과 빛의 방향들,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컵들, 곳곳에 숨겨진 모든 디테일들에 감동한 나머지 화장실에서도 눕고 싶어졌다. 만일 조금의 불편함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쁘게 받아들이리.
심장 떨리게 빛나는 문장과 반짝이는 디테일들이 숨겨진 공간을 동시에 만날 때면 잠시 더 살고 싶어 집니다. 집에 가지만 격렬하게 집에 가고 싶고, 누워있지만 격렬하게 누워있고 싶고, 살고 있지만 격렬하게 살고 싶은 것처럼요.
Local Editor Cholog 초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