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Movie 계절의 산문같은 영화/Editor.Cholog
뜨거운 날들이 무척 싫었는데 막상 여름은 다 지나고 나서야 미련을 남긴다. 찐득하기만 한 이 계절이 싫은 이유를 말하라면 꼬박꼬박 답할 수 있지만, 아주 강력한 이유 하나가 다음의 여름을 기다리게 한다. 여름 끝과 가을 사이 밤. 적당히 건조하고 시원한 밤바람이 찾아오는 시간. 너무 짧아서 조금만 늦으면 금세 추워져 버리는 날. 가을이 오려면 여름이 지나야 한다는 것. 딱 하나. 코에 드는 찬 바람이 느껴질 무렵에서야 ‘이 녀석 그렇게 덥더니 너의 몫을 해냈구나’ 싶다.
여름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풀벌레 소리와 조금은 쌀쌀하게 느껴지는 밤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가둘 수만 있다면 가둬놓고 원할 때마다 꺼내고 싶은 밤이 또 지나간다. ‘아, 좋은 날 다 지나가네.’ 괜스레 억울해져 싱숭생숭한 마음에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틈을 쪼개 보던 영상을 재생한다. 예측되는 대사와 예상되는 결말. 익숙한 것에서 위로가 찾아오는 밤.
① 영화 최악의 하루(2016)
"긴긴 하루였어요. 하느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빈틈만 눈에 밟힌다. 점점 바보가 되어가나 싶은 날은 늘어가고, 이렇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는 걸까 위기감이 몰려온다. 정말 누가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을 한 걸까. 커피 한잔 들이켜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본다. 진하게, 진한 각성으로. 다시 최선을 다해 남은 해를 살아보자고.
②영화 Aftersun(2023)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좋아."
-그게 무슨 뜻이야?
"노는 시간에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거든. 그러다 태양이 보이면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 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건 사랑이니까.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마음이 있다. 지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다 지난 무렵에서야 아쉬워지는 이 계절처럼. 볼 수 없게 되어서야 더 보고 싶어지는 사람처럼.
③KBS 드라마스페셜 아득히 먼 춤(2016)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날까?"
-아니요. 아무 소리도 안 나요. 듣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나는 난다고 생각해. 언젠가는 닿을 거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꼭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우리는 모두 평생 닿을 일 없이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별들이다. 별과 별 사이 수억 광년의 거리, 속삭이듯 말해서는 평생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난 온몸으로 춤을 춘다. 그 별의 당신에겐 아직 판독 불가의 전파에 불과하겠지만, 언젠가 당신의 안테나에 닿길 바라며,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춤을 춘다. 나만 아는 이야기로 춤을 춘다. 쏟아내는 진심이 언젠가는 닿길 바라며, 언젠가는 당신의 안테나에 닿길 바라며. 그때도 지금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 다음 여름에는 돌고 돌아 닿을 수 있겠죠.
장면이 끝나도 계속해서 귓가에 목소리가 맴도는 영화는 긴 산문을 읽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 시를 읽을 때처럼 소리를 뱉어 봅니다. 더듬더듬 소리를 내다보면 아쉽기만 한 이 순간이 잠깐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더라고요.
곳곳에서 한 해의 남은 날짜를 세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뒤로 소리 내어 말해볼게요. 무사히 잘 지나왔다고, 잠시 숨을 크게 쉬어보자고요. 지난한 여름을 떠나보내는 모두, 마음의 평화와 웃음!
Local Editor Cholog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