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있지만 고양이 카페는 아닙니다만, 리틀버드 / Editor.초록
인스타그램에는 게시물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다. 여러 관심사를 만날 때마다 저장을 눌러대는 나는 책, 장소, 신발 등등 나름의 기준을 세워 카테고리별로 분류해놓는다. 이것의 장점은 단연코 분류에 있지만 단점은 카테고리 안에서 잔뜩 섞인 관심사이다. 기준을 세워 카테고리를 만들었지만, 어느새 뒤섞여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될 때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나름의 분류를 얼레벌레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는 “큐티” 섹션에 있다. 이곳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정말로 “큐티”한 것만 존재한다. 아기와 동물, 오로지 이 두 가지만이 이곳에 저장될 수 있다. 마치 유미 마음에(유미의 세포들) 귀여운 것은 장땡으로 입장이 가능하듯, 나의 “큐티”섹션 안에서의 기준도 오로지 “귀여우면 장땡”인 것이다!
이 <귀여우면 장땡> 칸에는 아기가 2할, 강아지가 3할, 기타 동물들은 1할, 고양이는 무려 4할을 차지한다. 삶이 고구마처럼 팍팍하고, 닭가슴살처럼 퍽퍽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오면 조용히 인스타그램에 “큐티”섹션을 찾아간다. 이날을 위해 저장해둔 모든 작은 생명체들에 감탄하며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 있지!”를 외치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이 귀여움의 최대 한도치를 넘은 것들을 보며 끙끙 앓고, 괴로워하며, 몸서리치는 것을 반복한다. 이런 길티 플레저가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귀여우면 장땡> 코너에 있는 사랑스럽고 무해한, 눈사람 같은 존재들에게서 오는 마알간 마음이 나를 정화한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큐티”섹션의 저장 칸을 늘려간다.
고양이를 볼 때마다 엄마 앞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특히 엄마 앞에서의 내가 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유독 엄마에게 말이다. 나는 자주 제멋대로 행동하고,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듯 굴다가, 어느 날은 사랑이 잔뜩 필요한 사람이 되어 엄마 옆에 누워 고개를 비비며 빈틈없이 그를 끌어안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곳에 계속 자리한 집사의 모습이 되고, 나는 혼자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때가 되어 제 집을 찾아가는 고양이의 모습이 된다. 나는 고양이와 한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고양이의 똥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도, 고양이 모래가 얼마나 먼지를 날리는지도, 방금 한 청소가 의미 없을 정도로 털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 지도 알 도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고양이 성격이 얼마나 지랄 맞을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도 가늠할 수 없다. 다만 내가 길에서 마주한 고양이들과 주위 집사들의 이야기 선에서 고양이를 떠올려보자면, 고양이는 마치 엄마에게 손을 뻗는 나와 닮아있었다. 배가 고프면 우는 소리를 내며 집사 주위를 뱅뱅 맴돌아 밥을 얻어낸 후, 밥을 먹고 나면 언제 그렇게 곁을 맴돌았냐는 듯이 휘익하고 돌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처럼 말이다.
나는 고양이처럼 사는 것이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자기 생을 걸어가며 살다가, 느릿하게 햇빛 아래 누워 몸을 비비며 낮잠을 자다가, 발톱을 벅벅 스크래처에 긁다가, 어쩔 때는 주인의 무릎 위에 누워 잔뜩 애정을 느끼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갖지 못한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처럼 그도 그만한 묘생의 고단함이 있겠지, 냐옹-.
오랫동안 생각하면 어느새 그의 모습이 닮아간다고 하던가. 해가 좋은 날에는 밖으로 나가 좀 오래 걸어보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돌멩이처럼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하루 종일 잠을 자기도 하고, 요란스러운 변덕을 부려보기도 하고, 성질이 날 때는 꼬리를 잔뜩 세워 하악질을 하기도 하고, 사랑이 필요할 때는 달려가 애쓰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을 껴안고. 일상에서의 나는 해리포터 맥고나걸 선생님처럼 고양이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애써야 하는 사랑을 할 때 역시 묘의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절망적 이게도 사랑할 때의 나는 전혀 달랐다. 나는 늘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저는 여기 있어요”를 외치며 손을 내밀고 사랑을 기다렸다. 상처 받은 건 기억도 안 난다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사랑 앞에서 나는 자주 후졌고, 후진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아 역시 난 사랑하기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구나’ 하며 깨달았다. 본인이 사실은 그리 괜찮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마주하는 기분은 나를 더 후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때 마음에도 멍이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끝날 때마다 더 멋진 묘생으로 살기를 바랐다. 마음에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뒤로한 채 심드렁한 모습으로 유유자적 내 길을 걸어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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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도, 고양이도 좋아하지만 책임지는 것에 영 파이인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을 늘 탐색한다. 목적이 아닌 함께 존재하는 공간 말이다. 모든 사랑은 적절한 환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나는 현실 없이 환상으로만 그들을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사랑에 눈이 먼 환상의 콩깍지는 결국 벗겨지기 마련이므로.
이러한 의미를 고려했을 때 리틀버드는 나에게 그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고양이가 있지만 고양이 카페는 아닌 그런 곳. 들어가면서부터 새로운 장소가 펼쳐지는 기분이 드는 곳. 잘 키워진 담쟁이덩굴이 건물 주위를 감싼 탓에 더 신비로운 곳처럼 느껴지는 곳. 고양이 덕에 세워둔 펜스가 마치 “안녕, 고양이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해.”라고 대신 인사해주는 듯 한 그런 곳.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곳의 주인으로 자리 잡은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위치해있다. 그들이 이곳의 주인인 탓에 사람의 자리와 고양이 자리의 경계가 모호하게 펼쳐진다.
자리를 잡아 앉아있으면 주인들이 먼저 다가오기도 하고, 쓰윽 엉덩이를 내줬다가 폴짝 뛰어 다른 곳으로 휘적거리며 떠난다. 왔다가 떠나는, 애가 타고 사랑스러운 변덕을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공간을 활보하며 공간의 주인이 그들임을 뽐낸다. 그러다 보면 '아아 그래, 고양이는 이런 아이들이지, 이렇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잔뜩 사랑스러워지는 그런 아이들이지.'라고 읊조리는 나를 발견한다.
아마 그들을 원해서 그곳에 간다면 그 결심은 아주 큰 실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어보자. 그렇게 가만히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순간이 찾아오듯, 분홍색 젤리를 들이밀며 엉덩이를 토닥거려달라는 그들의 간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우리는 그저 그들 앞에 집사일 뿐이란 것을.
*Place*
아래 소개되는 공간들은 고양이가 있지만 고양이 카페는 아니다. 또 어떤 곳은 고양이가 있었지만 이제는 없기도 하고, 어떤 곳은 아주 가끔 고양이가 함께하기도 한다. 조금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려달라는 서문을 함께 적어본다.
✔️리틀버드 insta@littlebird__________
: 전북 익산시 무왕로 12길 10-1(신동)
: 평일 10:00 - 07:00, 토요일 10:00 - 05:00, 일요일휴무
글에 소개된 공간이다. 나는 이곳에서 가만히 앉아 정원을 보면서 풀멍을 해보기도 하고, 쿠키를 시켜 도끼 같은 나이프로 쿠키를 쓱싹 잘라 씹어먹기도 하고,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의 움직임을 종아리로 느껴보기도 한다. 리틀 버드는 그런 곳이다. 소개되는 공간 중 가장 고양이가 많이 있는 공간이긴 하지만, 우리들이 그들의 묘생에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듯, 그들 역시 우리들이 처음이라 그리 살갑지 않을 수도 있다. 너무 실망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간택을 기다려야 하는 집사의 삶일 뿐이니까.
✔️ 카페 시옷 /insta@706_5
: 전북 익산시 동서로 45길 7-4 (약촌오거리)
: 13:00-21:00(휴무 및 변동 인스타 공지 확인)
*point! 작고 조용한 공간을 찾는다면 카페 시옷이 어떨까. 나름 도로변이긴 하지만 번화가는 아니고, 공간이 작긴 하지만 구석구석 알차게 들어있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 근처에 길고양이가 찾아올 때마다 사료를 준비해 뛰어나가는 사장님의 마음까지 느낄 수 있다. 큰 창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커피와 제철과일이 올라가는 디저트를 함께 즐기며 때때로 찾아주는 길고양이를 관찰해보자.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분명 늘 기다리던 행운일 수 있으니!
✔️ 작은집 / insta@only_rose_k
: 전북 익산시 동서로 33길 56
: 월요일~토요일 11:00-20:00, 일요일 휴무
*point! 작은집의 묘미는 “집”같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곳에서 서로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공간은 정말 친구가 쉬고 가라며 자기 집을 내어준 것 같고, 어떤 공간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 혼자 놀러 간 기분이 든다. 청록색의 공기를 햇빛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곳. (고양이 썰을 사장님에게 스리슬쩍 여쭤보자.)
➕ 나이브 캣 insta@naive.cat
: 전북 임실군 임실읍 운수로 33-17 (익산은 아니지만 에디터의 사심을 담아 추천하는 곳)
: 평일 12:00-20:00, 주말 14:00-20:00(1시간 전 주문 마감/ 유동적 휴무)
*point! 사실 나는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그 꿉꿉한 냄새도, 안달 나게 하는 묘한 성격들과 뜨끈한 몸들도. 묘한 묘들. 아직도 생각나는 건 책상 밑에 모여진 후끈한 공기들이 내 다리에 닿을 때 그 촉감들. 이곳도 역시 고양이 자리가 먼저이다. 고양이에 내 자리를 내어주어 책상의 끄트머리에서 커피를 마셔도 불평 없이 웃고 지켜볼 수 있는 그런 곳. 조용한 사색은 덤.
*book*
: 사노 요코 / 100만 번 산 고양이
: 고양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책이 하나가 있다.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
백만 번을 죽고 백만 번을 산 멋진 얼룩을 가진 고양이의 이야기이다. 백만 명의 사람이 고양이의 주인이 되어 고양이를 귀여워했고, 백만 명의 사람이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지만 얼룩 고양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임금님, 뱃사공, 마술사 등 많은 주인을 거쳐 살고 죽을 때마다 고양이는 그 삶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고양이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다. 누구의 고양이가 아닌 자신만의 고양이가 된 얼룩 고양이는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자신보다 더 마음에 드는 하얀 고양이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며, 뽐내듯 입버릇처럼 외치던 “100만 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하얀 고양이는 할머니가 되어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고, 한 번도 울지 않던 얼룩 고양이는 100만 번을 울며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이 사라진 채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다.
얼룩 고양이는 왜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백만 번의 삶을 반복하면서 만족하지 못한 사랑의 힘을 하얀 고양이와 함께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두 번 다시는 하얀 고양이가 죽었을 때 느꼈던 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백만 번산 고양이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나의 사랑을 떠올린다. 감정은 감정대로 겪어냈던 나는 또다시 그 감정을 겪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종결이었다. 감정의 종결. 한쪽의 마음이 사라졌다고 해서 동시에 내 마음도 함께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사라졌지만 나는 내 남은 감정을 열심히 소진시켜야 했다. 얼룩 고양이처럼 밤과 아침이 찾아올 때마다 엉엉 울기도 하고, 열심히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누워있기도 하고, 하루하루를 얼룩 고양이가 백만 번 죽었다 살아나는 것처럼 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늦은 이별이 찾아왔다. 그의 이별은 이미 저 앞에 존재했지만 나의 이별은 이제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또 행복이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나는 얼룩 고양이처럼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했을까. 아마 나는 다시 또 다른 삶에서 행복으로 무지개를 건너는 사랑을 겪기 위한 태어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마 그 끔찍하고 사랑스러운 이유를 또 겪기 위해 백 한 번째 태어나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music*
: Brahms Piano Sonata No. 2 in F-sharp minor, Op. 2
: 나는 늘 브람스의 음악 같은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의 웅장함을 사랑하지만 정작 내 사랑은 브람스의 음악 같기를 바랐다. 클라라를 사랑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