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이 바로 나였다
번화가를 걷다 보면 꼭 보는 가게가 있다. 사주집 또는 타로집. 옛날에는 볼 때마다 혹해서 들어가고 싶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 자신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내 미래는 어떻게 될지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될까요? 저는 어떤 운명을 타고났나요?’ 나는 나를 몰라서 너무나도 불안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심리테스트나 혈액형 분석 등 나를 탐구하는 놀이에 쉽게 빠졌다. 어디서 연구했는지 출처도 모를 테스트에 정성 어린 답변을 하는데 매번 나름 진지하게 임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적성과 꿈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였기 때문이다.
30대가 되어 좋은 점은, 이런 자아 탐구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내 성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왜 그러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나름의 분석도 가능하다. 남들보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면 측은지심을 심하게 느끼는 내 성격. 그런데 특정 상황에선 다른 사람에게 굉장히 냉정한 면도 있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이런 성격 중 하나가 발현이 되어 나의 못난 모습을 보게 되면 그것을 부정하고 심하게 우울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받아들인다. 내가 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다양한 경험들과 심리학 지식들을 통해 이유를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고치기는 힘들다… 받아들이는 것뿐)
혼란의 10대와 20대를 거쳐 30대가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단축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표현하기’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처럼 내 안의 무언가를 꺼내는 과정 말이다. 우리의 육신은 너무나 작아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담아두고 있을 수 없다. 아니, 내가 무엇을 담고 있는 사람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좀 더 빨리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새벽에 맑은 정신으로 일기를 쓰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래서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은 내 안의 엉킨 실타래들을 풀어내는 과정이었다. 모두 풀어낸 후에야 이 실이 어떤 색을 가졌는지, 어떤 식으로 엉켜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며 나 자신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때가 있다. 지난봄에 일기를 쓸 때였다.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고, 책을 쓰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기와는 다른 형식의 글을 쓰고 있다. 아주 작은 꽃씨에서 줄기와 잎이 자라 마침내 꽃을 피워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알 수 있다. 어느 꽃의 씨앗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건 이전에 같은 씨앗을 봤던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태어난 유일한 존재이기에 우리가 무슨 씨앗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르만 헤세는 이 씨앗을 알이라고 표현했지.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글 또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면서.
꽃꽂이 작품을 만드는 일도 글을 쓰는 일과 같았다. 꽃꽂이를 시작하고 나에 대해 알게 된 점 중 하나는, 내가 생각보다 명도와 채도가 높은 쨍한 색감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빈티지한 파스텔 계열의 색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꽃을 고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밝고 강렬한 색의 꽃에 손이 갔다. 노란색 역시 너무 존재감이 센 것 같아 꺼려하는 색이었지만, 노란 메리골드와 테디베어 해바라기, 노란 장미들을 꽂아보며 그 발랄한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리듬감이 없는 형태를 규칙에 따라 꽂는 것에도 편안함을 느꼈다. 요즘 소셜미디어에서 많이 보이는, 하트 모양처럼 양 옆이 높은 프렌치 스타일 작품도 예뻤지만 동그란 반구형 모양으로 꽃을 꽂는 방법도 마음에 들었다. 균형감이 있는 안정적인 느낌도 좋았고, 동글동글한 모습이 그저 귀여웠다. 예전에는 이런 대칭을 이루는 방식이 촌스럽게 느껴져서 기피했는데, 막상 꽂아보니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눈으로 구경만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직접 표현해보니 나의 취향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내 손으로 만든 이 작품은 플로리스트라는 꿈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작품이 곧 나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진 않지만 가장 나와 닮았기에 세상에서 제일 마음 가는 내 작품.
플로리스트라는 꿈이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나만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언가를 집중해서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잡념이 사라지고 그로 인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휴식시간에 누워 핸드폰을 보다 보면, 몸은 편안하지만 머리로는 세상의 온갖 자극적인 소식들이 들어와 나도 모르게 피로감이 쌓인다. 그리고 핸드폰을 끄면, 그 화려한 세상의 불빛도 꺼진다. 이 공간에 나만 홀로 남는다. 하지만 꽃꽂이 작품을 만든 후에는 일주일 동안 나와 생활하게 될 아름다운 모래시계가 남는다. 내 공간에 생기를 주는 작품을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은 내 마음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내 안의 것들을 표현하면서 오는 해소감과 해방감 때문이다. 사주집에서 대면으로 사주풀이 결과를 듣고 상대와 소통하다 보면, 이 풀이가 정확한지 알 길이 없음에도 내 마음이 편해짐을 느끼곤 했다. 보통은 내 고민들을 이야기하며 심리상담을 받는 것 같은 분위기로 흘러간다. 친구들에게 내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공감을 받으며 치유받는 느낌과 비슷하다. 이와 비슷하게 내 작품 역시 나를 다독여주는 역할을 했다. 나를 표현하는 이 시간을 통해 내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도 같이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 대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무기가 생겼다. 그토록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붓 대신 꽃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표현하는 방식이 그림에서 꽃으로 바뀐 것뿐이다. 이제 드디어 미술대학교에 집착했던 나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미련 없이 내 어릴 적 작은 한스러움을 날려버릴 수 있겠다. 항상 무기력하고 답답했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꽃이라는 무기를 가지게 되었으니, 내 안의 무언가를 꽃을 통해 계속 밖으로 꺼내어 보기로 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의 주제는 물론이고 내 어두운 면까지 모두 풀어내고 싶다. 그 과정을 통해 꿈을 이룰 수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꽃을 배운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노력 대비 실현 가능성이 높은 꿈만 찾아다니는 일은 이제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이 선망하는 꿈을 꾸는 일도 싫다. 이제는 느리고 소박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찾는 꿈을 꿀 것이다.
'Don’t wait for inspiration. It comes while one is working.'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지 마라, 영감은 열중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 앙리 마티스
열중하고 있을 때 영감이 찾아온다는 말이 이제는 달리 보인다. 영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 안에 이미 모든 영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글이든, 음악이든, 조형작품이든 내 안의 무언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그것을 꺼내어내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우리 안에 잔뜩 뒤엉킨 고민과 걱정들 밑에서 숨어있던 영감, 그 생명력을 찾아와야 한다. 꽃과 함께라면, 그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과정이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글과 꽃으로 꾸준히 실타래를 풀다 보면 나도 어느 순간 그 생명력을 발견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필 것이다. 그 꽃 피우는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꽃과 함께 꿈꾸며 나를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