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자발적 배움이 멈춰지는 순간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추적 60분〉의 '7세 고시,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 편을 보았다. 일곱 살 아이들이 대치동의 어학원에 줄지어 서서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장을 거부하며 우는 아이, 시험이 끝난 후 친구에게 “너 몇 점이야?”를 묻는 아이. 너무 일찍부터 경쟁에 던져진 아이들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이른 통과의례처럼, 아이들은 누군가의 불안을 짊어진 채 또 하나의 자격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며 떠오른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있다. 늘 앞장서서 학급을 이끌던 아이였다.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장난도 잘 쳤고, 발표도 겁내지 않던 아이.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조용히 학교를 그만두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자퇴서를 내고 사라진 그의 빈자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당시엔 그저 혼자 공부하고 싶다는 말만 들었지만, 나중에서야 그의 이야기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우리 지역에서 유명한 수학 학원의 수학올림피아드반에 다녔다. 각종 경시대회에 출전하며 ‘영재’로 불렸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던 일이 있었다. 평소 사근사근하던 그가 어머니를 보자 돌연 표정을 굳히고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피했다. 친구 어머니는 당황했고, 주변은 잠시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그 장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는 중학교 이후,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집에서 점점 말수를 줄였고, 성적은 여전히 상위권이었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고 했다. 결국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자퇴를 결정했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부하고 싶다며, 부모님의 반대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 안에서 에릭 에릭슨의 '근면성 대 열등감' 단계를 떠올린다. 대략 초등학교 중학년 무렵, 이 시기 아이는 또래와 협력하며 함께 일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역할과 가치를 탐색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반복해서 외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받고 통제되면, 아이는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내면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자기 인식은 차츰 자기 검열로 이어지고, 창의성은 위축되며, 타인의 기대에 맞추려는 순응과 반항 사이에서 정체성은 흔들린다.
삶을 탐색하는 주체로 성장해야 할 시기에, 아이는 평가의 대상이 된다. ‘나는 틀릴 수 있는 존재다’가 아니라, ‘틀리면 안 되는 존재다’로 학습해 버린다. 그렇게 한 아이의 배움은 점점 좁아지고, 살아 있는 질문은 침묵하게 된다.
지금 나는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 반 아이들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도 꾀꼬리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날, 우리 학교 선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어린아이들은 기가 성하다고.
그래, 아이들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처럼, 이 시기의 아이들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지식을 구성해 간다. 그들에게 배움은 책상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다.
나는 교실의 맥락에서 배움의 본질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알려준 정답보다, 스스로 발견한 작은 의문을 오래 기억한다. 사물함 속 썩어 버린 나뭇잎을 보고 그 냄새의 이유를 찾아내려 했던 아이의 눈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바로 귀납적 배움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배운다. 자신이 겪은 수많은 사례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고, 거기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지금 많은 학교 수업은 여전히 연역적으로 흘러간다. 결론부터 제시하고, 그에 맞는 사고를 요구한다. 교사의 질문에 적절한 정답을 골라 말하는 것이 '배움'이 되고, 그 외의 움직임은 산만함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아이들은 점점 생각을 멈춘다. 사고는 사라지고, 수용만이 남는다.
나는 수업에서 IB 프로그램의 일곱 가지 주요 개념(Key Concepts)을 아이들과 함께 익히고 활용한다. 이 개념들은 단순한 학습 주제를 넘어, 아이들의 탐구를 안내하는 일종의 ‘생각의 렌즈’가 되어 준다. 형태(Form), 기능(Function), 인과(Causation), 변화(Change), 책임(Responsibility), 연결성(Connection), 관점(Perspective) — 우리 반은 이 개념들을 ‘탐구안경’이라 부른다.
아이들은 탐구안경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선생님, 오늘은 어떤 안경 껴요?
인과 안경은 왜 안 보여요?
안경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색깔과 모양을 상상하고, 심지어 나에게 손으로 안경을 만들어 자기에게 씌워달라고 조른다.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난다. 이런 모습들이 단순히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안경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함께 형태 안경을 끼고 나뭇잎 속 선의 세계를 탐색한다. 인과 안경을 쓴 날에는, 왜 나뭇잎에 선이 생기는지를 물으며 원인을 추적한다. 알루미늄 호일을 구기고 다시 펴는 활동을 통해 변화 안경을 경험했던 날, 아이들은 변화의 과정을 직접 몸으로 익혔다. 이 모든 활동은 아이들이 삶 속에서 개념을 붙잡는 방식이다. 추상적인 개념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 길어 올려진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1학년이 무슨 탐구를 하겠어요.
탐구를 하기엔 너무 어리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탐구자다. 다만, 그들의 방식은 어른들과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작은 자퇴’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탐구안경을 나눠 끼고 세상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은 여전히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지만, 그 안에는 치열한 배움의 몸짓이 숨어 있다. 언어가 따라가지 못한 감정은 몸으로 드러나고, 질문은 행동으로 표현된다. 그 미완의 언어 속에서 나는 성장의 단서를 읽는다.
아이들은 지금,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그 마주함의 방식이 조금 서툴고 불완전할지라도, 나는 교사로서 그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려 한다.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타인의 기준에 의해 꺾이지 않도록.
아직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아이들은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교사라는 업의 시작이 아닐까. 아이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는 그 방식은, 결국 우리 인간이 성장해 가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서, 경쟁이 아닌 호기심으로 열리는 자발적 배움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