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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Dec 25. 2023

단 한 사람을 위해

초등학교 시절 우리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이사를 오셨어요. 서울에서 사셨다고 들어서 서울할머니라 불렀어요. 어느 해 크리스마스 즈음 교회에서 날마다 성탄전야제 연습을 할 때였어요. 여럿이 교회를 오고 가다 서울할머니 얘기가 나왔어요. 성탄절을 혼자 보내실 서울할머니를 위해 공연을 하자는 말이 나왔고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어요. 교회에서 연습이 끝나면 다시 모여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어요. 교회의 공연보다 더 설레고 기대가 되었지요.


성탄절 예배를 마친 후 모여 연습을 하고 이것저것 준비물과 의상을 챙겨 저녁에 서울할머니 집으로 갔어요. 우린 모두 들떠 있었죠. 할머니의 방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꽃이 수놓아진 희고 큰 천이 보였어요. 그 하얀 천과 벽사이가 우리의 대기실이었어요. 벽에 딱 붙어 순서를 기다리며 앞에서 공연하는 아이들의 소리에 키득거리며 웃었어요. 웃음소리가 천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손으로 입을 가리던 우리의 모습을 떠 올리니 다함없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연극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율동도 했어요.


할머니는 앞에 앉으셔서 손뼉 치며 우리의 공연을 보셨어요. 공연을 끝내고 할머니와 앉아 얘기 나눌 때 우리 손을 하나하 나 잡으며 고맙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는 할머니 방을 청소하고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하고 나왔어요.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은 뿌듯함으로 금방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왁자지껄 떠드는 우리 목소리에 동네 개들이 여기 기서 짖고 난리가 났었지요. 평소 같으면 개 짖는 소리에 잠을 깼다며 누군가 "야, 조용히들 다녀."소리지를까 봐 발걸 조차 조심했을 텐데 그날은 즐거움이 커서 그런가 그런 염려 따윈 되질 않더라고요. 지나고 보니 우린 그때 행복했 어요.


할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얼마동안 더 사시다가 서울로 다시 이사를 하셨어요. 서울로 이사하신 후로 할머니의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었어요.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세상이 춤출 때면 먼저 떠 오르는 추억이에요. 서울할머니의 얼굴은 기억에 없지만 그날 할머니의 방에서 느꼈던 온기와 아이였던 우리들의 웃음과 모습은 느껴지고 들리고 보이는 듯해요.


깊은 밤입니다. 아침이 오면 크리스마스예요. 캐럴대신 타닥타닥 노트북의 발소리를 듣는 중입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열네 살 딸아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웃는 소리, 나직하게 들리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아주 평범해 아늑함을 느낍니다. 오늘 상당히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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