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조상의 지혜
여름은 역시 과일과 채소의 계절이다. 입맛이 없어지는 계절이지만 그만큼 신선하고 풍성한 과일과 채소가 끼니를 책임져준다. 최근 기후변화로 계절이 점점 이상해진다고 느끼긴 했지만 올해는 엘니뇨 등으로 또 한 번 기록을 세웠다. 폭염, 폭우 뭐든지 폭자가 붙거나 아니면 역대급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기후가 극단적으로 변하면 사람이 견디기 어려울 뿐 아니라 농산물 작황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말라 죽거나 물에 떠내려 가거나 맛이 덜 들거나.
올 여름이 딱 먹거리 걱정이 드는 시기였다. 과일값이 치솟고 그나마 맛있는 걸 찾기도 어려웠다. 여름사과 아오리도 먹고 싶었는데 마땅히 맘에 드는게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집 앞에 어떤 할아버지가 트럭을 끌고 왔다. 한 봉지 가득 담아 오천원. 내 주먹보다 작은 꼬마사과만 모아 놨지만 일단 가격이 부담이 없어서 한 번 사봤다. 역시 식감이나 맛은 그만그만. 아오리 특유의 질긴 아삭함도 새콤한 맛도 없었다. 양은 꽤 많은데 어떡할까 하다가 나도 한번 절임을 만들어보자 싶어서 잘게 썰어서 황설탕을 살짝 넣어 하룻밤을 재웠다.
아침에 호밀빵을 하나 구워서 잼을 아주 살짝만 발라 입혀주고 그 위에 하룻밤 재운 사과절임을 듬뿍 얹어 먹으니 오 괜찮았다! 절이면 수분이 빠져나와서 그런지 대부분 식감도 꼬들꼬들해진다. 황설탕을 한 두 스푼만 쓱 뿌려줬는데 맛도 딱 적당하게 달달해졌다. 용기 아랫쪽에는 적당히 사과물이 빠져나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절임은 여름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린다. 시원한 오미자 주스에 함께 넣어 화채로 먹어도 찰떡 궁합.
소화가 안 되는 와중에도 가끔 밥 아닌 빵이 땡길 때가 있어 여기저기 많이 사먹어봤다. 홍대, 여의도, 용산, 서촌 등 주말 나들이 가는 동네엔 정말 유명한 빵집이 많다. 한식보다 양식이 이젠 더 많아진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런데 의외로 내가 먹기 좋고 가격까지 합리적인 집은 잘 없다. 수많은 빵집 중 내가 다시 가서 사게 되는 곳은 여의도 브레드피트와 홍대 베어스덴 정도? 그런데 지난번 태풍 오던 날 우연히 공덕시장 들렸다가 그 앞에 뺑스톡에 들어갔는데 커다란 호밀빵 홀사이즈가 오천원이었다. 밀도 높은 식감에 건강한 맛도 좋고 너무 만족했다. 게다가 위치도 제일 가깝네. 앞으로는 여기를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교토 여행 이후 꾸준히 해먹었던 반찬, 오이절임.
오이의 청량한 식감이야말로 여름을 대표하는 맛 아닐까? 게다가 소금과 식초에 어우러지고 나면 입맛 없는 여름에 정말 최고다. 방울토마토까지 넣어 함께 절였었는데 한동안 내가 원하는 맛이 안 나다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도전. 이것도 정말 쉽다. 이번에는 일본 츠케모노 레시피를 따라가 보았다.
비닐 봉지에 오이를 썰어넣고 소금 1스푼(조금 넉넉히 더 넣었다), 간장 0.5스푼(나는 생략), 와사피 1스푼, 설탕 1스푼. 그리고 마구 흔들어 준 후에 냉장고에서 하룻밤 숙성.
아침에 일어나보니 진한 물이 나와 있고 오이는 잘 절여져 있었다. 왜인지 지금까지 3번인가는 내리 실패하여 어딘지 들척지근하거나 잘 안 절여졌거나 하여간 맛이 없었다. 내 생각엔 소금의 양이 관건인 것 같다. 맛있는 김치도 담아보면 잘 절이는 게 핵심 아닌가. 그러나 어느 정도의 양으로 어떻게 절이는지는 그야말로 도제의 비법이라 매뉴얼로 적기 쉽지 않다. 그런거 보면 절임, 발효 등의 요리 기법이 쉬워 보이면서도 깊은 세계를 가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번엔 오랜만에 성공! 슴슴하지만 아삭하게 잘 절여졌다. 식초와 참기름을 둘러 한번 주물주물 해주고 유리통에 담아두었다. 이렇게 냉장고에 좀 더 숙성시키면 아주 만족스러운 맛이 될 것 같다.
다른 식재료는 몰라도 채소와 과일은 풍성해야 사람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다던 엄마 말이 생각난다. 기후변화가 여러 모로 무섭다. 그래도 딱 입추였던 며칠 전 아침 바람이 갑자기 서늘하게 바뀌어 너무나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엔 하나의 로망으로 옛날 이야기와 풍경을 좋아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실생활에서 점점 옛날의 지혜를 찾게 되고 자연 친화적으로 살고 싶어진다. 자연스러운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