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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an 01. 2021

단골 가게의 배신

초짜주부의 슬픈 장보기

오늘은 그저 장보기 실수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풀기 위해 글을 쓴다.

대부분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결혼 전에는 집안살림과 관계없이 편하게만 살다가 결혼과 동시에 생활모드로 전환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특히 장바구니 물가 파악이 쉽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경험한만큼 잘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품목은 여러 번 사다보니 대충 감이 자연스럽게 생겼는데 나에게 끝까지 어려운 것은 고기였다. 원래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에 고깃집 자체도 자주 다니질 않았고 따라서 중량이나 가격은 아주 모호한 개념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신혼집 동네에 특화된 가게가 많이 없어서 왠만한 식료품은 상가 슈퍼마켓이나 인근 마트에서 구입했다. 그런데 단 하나 작은 정육점이 슈퍼 옆에 생겼다. 마치 총각네 야채가게 같은 이미지로 젊은 청년들 서넛이 동업으로 가게를 연 거 같았는데 항상 활발하고 싹싹한 모습이 매우 호감을 주었다. 자연히 고기는 나도 모르게 거기 가서 사게 되었고 왠지 작은 동네 가게니까 단골 느낌도 들면서 신선한 고기를 저렴한 가격에 살 것만 같은 이유없는 느낌도 가지게 되었다. 

돼지고기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가끔씩 소고기를 살 때 나는 실수를 거듭했다. 일단 이 곳은 소고기는 한우만 취급하는 것 같았다. 기본 가격이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실제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이 주문하거나 혹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가격이 아닌데 지불하게 되는 일이 자꾸 생겼다. 포장되어 진열된 상품들은 양도 가격도 공개된 상태에서 내가 고르지만 이런 정육점은 용도와 중량을 말하면 안에서 고기를 꺼내다가 썰어주는 경우가 많다보니 나처럼 명확하지 않은 고객들은 이상하게 빠질 위험이 컸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인상이 좋은 젊은 사장님들을 믿고 싶어서였을까? 난 꾸역꾸역 그 가게를 이용하고 있었다. 

새해를 맞아 떡국을 해먹고 싶어서 난 가벼운 맘으로 또 그 가게에 들어갔다. 떡국 레시피를 보니 소고기 100g 정도를 잘라서 기름에 달달 볶은 후에 끓여 육수를 내라고 되어 있었다. 최근 음식 양 조절에 민감했던 나는 그걸 보고는 2인분이니 넉넉잡아 300g 정도를 달라고 하자, 하면서 중량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떡국용 소고기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살테니 적당한 고기가 준비돼 있겠지, 하는 마음에 나는 부위도 가격도 쏙 빼먹고 떡국용 소고기가 있는지 물어본 후에 시원하게 그렇다고 돌아오는 대답에 300g을 달라고 덜컥 주문해버렸다.

고기는 아주 좋아보였다. 작은 덩이 두개를 썰어 저울에 올리니 340g 나왔다. 심지어 잘라 달라고까지 주문했다. 그러고나니 마지막으로 3만원이라는 가격이 떡 청구되었다. 난 너무 놀라서 순간 잠시 정지했다. 고기 한 주먹에 3만원이라니 이게 왠 날벼락인가... 그런데 이미 잘게 잘라놓기까지 한 고기를 안 사겠다고 무를 수도 없었다. 겨우 꺼낸 말이 이거 어느 부위냐는 것이었는데 굉장히 품질 좋은 치마양지살이라는 대답에 화도 못내고 쓰린 속을 움켜쥐고 나왔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른 채소를 사러 슈퍼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바로 옆 고기 코너를 보니 한우 국거리 300이 만3천원으로 찍혀 있는게 아닌가.......... 그 순간 사기 당한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심정이었다. 한우도 등급은 있겠으나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날 것이며 딱 봐도 뭐 모르는 초짜가 사러 오니 떡국용 소고기 있냐는 물음에 최고급 제일 비싼 고기를 썰어준 것인가?? 동네 장사 하는 작은 가게에서 어쩜 그럴 수가 있나 싶어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전화가 마침 걸려와 통한의 스토리를 쏟았으나 짚어볼수록 내가 너무 허술했기에 씁쓸할 뿐이었다. 엄마도 나중엔 위로가 안되니 그래도 비싼 만큼 영양가 있고 맛있겠지~ 하는데 더욱 속이 쓰렸다. ㅋ

손재수가 있는 날이었을까. 대부분은 물건을 살 때 가격을 재어보고 결정하지만 어떤 날은 이상하게 살짝 긴장이 풀려서 그냥 주인을 믿고 주문하기도 한다. 특히 주인을 아는 동네 가게가 그럴 위험이 높다. 사실 인간적 접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점점 무인시스템으로 변해가는 세태가 싫고 가게마다 주인을 알고 반갑게 인사나 대화도 나누는 옛날 풍경이 좋다. 그런데 그건 '좋은 사람들' 끼리라는 매우 큰 전제가 따라 온다. 좋은 주인인 경우에 초짜인 고객에게도 친절하게 상품 설명도 해주고 좋은 걸 권해주며 신뢰 관계가 구축된다. 

말로만 팍팍하다고 하다가 동네에 거의 유일한 단골(?)가게에서 새해부터 뒤통수를 제대로 두드려 맞고 나니 세상 무섭다는 게 제대로 실감이 난다. 앞으로는 대형 브랜드 슈퍼 마트나 다니면서 내공부터 키워야겠다. 항상 간절히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치유받고 싶은 나지만 오늘은 완전히 1패를 기록했던 날이었다.

2021년 떡국은 5배로 맛있게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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