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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ul 11. 2021

열무김치

여름이 왔다

더위가 찾아오는 딱 그 무렵 열무김치도 함께 찾아온다. 열무김치가 상에 올라오면 나는 여름이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요즘은 과일이든 채소든 하우스 재배로 제철 개념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여름이 시작되면 열무와 얼갈이가 여기저기 판매대에 가득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체질과 관계가 있는지 배추보다는 무 김치가 좋고 그 중에서도 열무김치는 이유 없이 입에 당기고 맛있어서 좋아했다. 여름 생일이라 그런가? 생각해보니 과일도 여름과일이 훨씬 좋다. 나는 고수를 비롯한 이국적인 향의 식재료를 잘 못 먹는 편인데 그에 비해 깻잎이나 쑥갓의 알싸한 맛은 너무 좋아하고 열무 특유의 풋풋한 비린내도 참 좋다. 재료를 잘못 선택하면 김치 맛을 확 버리는 다른 재료들과 달리 열무는 왠만한 것을 선택해 담아도 항상 맛있었던 것 같다. 푸성귀가 흔해지는 여름 채소 답게 헐한 값에 풍성하게 사서 대충 버무려 담아도 그저 맛있기만 했다. 그냥 버무린 겉절이도 좋고 풀 쑤어서 국물 자작하게 담은 물김치도 맛있다. 온갖 채소 반찬을 제치고 나에게는 그저 열무김치인 것 같다.

열무김치와 계절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에도 느껴진다. 주로 열무김치를 내는 식당은 칼국수, 막국수 등 국수집과 밥을 비벼먹을 수 있는 평범한 백반 한식당이다. 요즘 우리나라 식당의 90% 이상은 비용 때문에 중국 김치를 쓴다고 한다. 슬프지만 그렇다. 물엿처럼 끈끈한 양념에 번들번들 빛나는 색의 중국김치는 몇몇 식당에서는 때깔만 봐도 알아보일 때가 있다. 알아도 어쩔 수 없이 먹는다. 돈과 비용의 문제에 걸리게 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아주 가끔씩 이 집은 직접 담근 김치 내는구나 하는 집들이 있다. 오래 장사한 작은 가게들 중에 그런 곳들이 있다. 사실 배추나 무김치는 완전 판별이 쉽지 않다. 그런데 내 느낌인지는 몰라도 열무김치만큼은 직접 담궈 내는 곳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일단 열무는 식당들조차도 사계절 균일하게 내놓지 않는다. 5~6월 여름 초입이 되면 어느새 갓 담근 풋풋한 열무가 겉절이로 상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계절을 느끼는 건 물론, 이건 왠지 여름 한 철에만 주인이 직접 담아 낸다는 생각이 들어 더 맛있게 먹게 된다.

최근 그런 식당에 연달아 갔었다. 한 곳은 추어탕집. 골목 안쪽에 있지만 상당히 오래됐고 동네 단골도 많아 보이는 집인데 조금씩 내오는 반찬이 다 맛있다. 배추/무 김치도 훌륭하지만 여름에 나오는 열무 얼갈이 김치가 일품이다. 분명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담그시는 것 같다. 여름이 지나면 이 김치도 끝이다. 얼마 전 추어탕을 먹으러 가서 오랜만에 나온 열무김치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릇이 비워질 때쯤 더 갖다 드릴까요? 하고 챙겨주는 인심도 항상 고맙다. 이런 곳은 정말 오래 있어주셨으면 싶다.

또 한 곳은 막국수 집이었다. 여긴 메뉴 때문인지 열무김치가 항상 메인으로 나왔다. 한참 안 가다가 여름이 되어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아쉽게도 주인이 바뀐 듯 했고 김치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메인 메뉴도 메뉴지만 식당의 수준은 가끔 김치 맛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마치 예전 안주인 손맛을 김치와 장맛으로 평가한다고 했었듯. 잘 먹고는 나왔는데 왠지 다시 안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텃밭에서 솎은 열무로 엄마가 김치를 한 통 담아줬었다. 어린 열무가 기가 막히게 연하고 맛이 있어서 나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오늘 다시 친정에서 열무김치 한 통을 더 얻어왔다. 제철이고 헐하고 네가 많이 먹으니 좋다며 얼마든지 더 담아 줄테니 다 들고 가라는 엄마 말이 고마웠다. 

덥고 습해서 왠지 지치고 나른해지는 여름. 그렇지만 여름은 또 이런 맛인 것 같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억수로 쏟아지는 비. 일도 좀 쉬어가고 그늘에서 좋은 책도 읽고. 열무 된장에 밥 비벼먹고 식후엔 달콤하고 물 많은 과일 실컷 먹고. 여름 생이라 그런가. 나는 이런 전통적인 여름이 좋다. 점점 자연스러운 것이 없어지고 인공적이고 삭막해지는 시대지만, 이번 여름엔 나무가 우거진 원두막에 누워 완전히 옛날 사람처럼 여름을 보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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