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혼자 늙고 싶지 않다

by 은주

스물의 끝자락에 캐나다로 언어 연수를 갔다 왔다. 영어를 잘하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더 괜찮은 삶이 올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대기업 기획실을 그만둔 백수였다. 헤어지지 못해 질질 끌던 연애도 끝이 났고, 모든 것이 엉망인 상태로 서른을 시작했다. 그렇게 3년 동안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가진 것만 축내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부족한 내가 창피해서, 머리를 파묻으면 아무도 볼 수 없을 거라고 믿는 타조처럼 이불속에 틀어박혀 며칠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는 여행은 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영어를 잘하는 회계사가 되는 건 어때?’

예전에 유학 박람회에서 봤던 엑시터 대학교가 떠올랐다. 그해 영국 내 대학 학과 순위에서 회계학 석사 과정이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꼽혔다. 무엇보다 마음이 끌렸던 건 대학의 캠퍼스였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잘 조성된 정원은 백작 부인이 거닐 법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중에 알았지만, 대학은 백작의 기증으로 설립되었다. 몇 년간 잊고 지냈던 영국식 젠틀맨의 상징이 떠올랐다. 까칠하면서도 소심하고, 차가우면서 거만한 표정을 한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Mr. Darcy). 아니면 <브리짓 존스의 일기(Bridget Jones’s Diary)>의 마크 다아시(Mark Darcy)도 괜찮겠지. 그곳에 가면 그런 사람과 연애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래, 영국이다.

“엄마, 나 유학 갈래.”

“뭐?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어딜 간다고?”

“큰 물에서 놀아야 시집도 가지. 영국은 땅이 넓으니까 괜찮은 사람도 많겠지.”

속으로는 ‘시집은 뭐 혼자 가나? 시집은 안 갈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감언이설로 엄마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꼭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여행이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출발부터 ‘떠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종착역은 다시 집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이 아닌 영국 집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대학원에서 회계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직장도 잡았다. 함께 여가를 보낼 가족이 없는 나는 회사에서도 이상적인 재무팀장이었다. 야근이 많아도 불평하지 않았고, 출장도 즐거웠다.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승진도 했고, 영국에서의 완벽한 싱글 라이프를 완성해 줄 집과 차도 장만했다. 새해를 파리에 사는 친구들과 보냈고, 매년 유럽의 구석구석을 다섯 곳 이상 다녔다.

하지만… 감기몸살과 영국 이민국의 비자 갱신 지연으로 인해 새해를 홀로 보내야 했던 41세의 어느 날, 엄마의 푸념이 떠올랐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왜 우리 딸은…”

나는 이 말을 싫어한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말 같지만, 오히려 상처가 되는 말이다. 짚신은 왼쪽, 오른쪽 구분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신어도 되는 신발이다. 이 말을 사람에게 쓰면 결국 ‘다 똑같으니 고르지 말고 아무나 만나라’는 의미가 된다. 아무나 만날 거면 이때까지 싱글로 남지도 않았다. 엄마의 푸념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종종 친하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것이 가족이 되었을 때는 내상이 깊이 남는다.

그날 밤, 혼자 끙끙 앓아누워 있으며 자신에 대한 연민과 지나간 연애의 대한 후회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혼자 늙고 싶지 않다.’

그다음의 질문도 던져보았다.

‘최선을 다해 누군가를 만나 볼까?’

연애와 결혼도 일과 마찬가지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

‘누군가는 어디서 만날 것인가?’

‘다른 이들은 어떻게 만났을까?’

성공한 연애 전략을 벤치마킹하여 나의 연애를 완성해야 한다.

나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잠시 멈추거나 망설이면 떨어지는 것처럼 내 인생도 그렇게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스스로 멈추는 법을 몰랐다. 공부나 시험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연애나 결혼은 다르다. 상대가 있으니 혼자 노력한다고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모든 핑계를 대도, 나는 과연 연애에 진심이었던가? 안도현 시인의 시처럼 연탄재도 뜨겁게 사랑했는데 연탄재보다 못한 생으로 마감하게 생겼다. 회사에서의 승진만큼 연애에 노력을 기울였던가? 대답은 No였다. 그래서, 나는 욕망의 러닝머신에서 내려오기 위해 스톱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현실적인 연애의 *OX 분석을 시작했다.

20개 정도의 질문 중에서 동그라미 친 것들만 서술형 질문지로 다시 만들었다. 반드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느낀 대로 사람을 만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2016년. 마흔하나. 딱 1년만 승부를 걸어보자.

그래도 실패한다면 미련을 버리고,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후회 없이 즐기리라.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연애 세포를 깨우고, 최선을 다해, 싱글 탈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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