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싱글 탈출 프로젝트를 시작 한지 6개월이 지났다. 일곱 명의 남자를 소개팅, 선상데이트, 스피드 데이팅, 자만추로 만나 보았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앞으로 6개월도 같은 패턴으로 흘러갈 것 같아 기운이 빠졌다. 이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써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하지만 '1년은 후회 없이 노력해 보자'라고 결심한 만큼 액션플랜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문제점을 찾기 위해 OX분석을 시작했다. 20개의 문항을 OX로 나누어 서술형 답변을 완성했다. 딱 맞는 사람은 없을 수 있지만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다.
이 모든 조건이 단순히 '나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삶과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한, 나만의 기준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OX 분석을 마무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7월의 첫날. 비가 내려 괜히 축 처진 금요일, ‘오늘은 그냥 집에서 호박 부침개나 부쳐 먹어야지’ 생각했다. ‘일 끝나고 윈저에서 만나’ 모임의 주최자인 술라로부터 문자가 왔다.
‘넌 올 거지? 비가 와서 다들 못 온다고 해서 걱정이네.’
나도 이런 종류의 모임의 주최자가 되어본 적이 있어서 시들한 모임이 걱정되는 술라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늦게라도 갈게’라고 답장을 보내며 택시를 잡아 탔다. 소방서를 개조해 만든 펍인 ‘파이어 스테이션’은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어 많은 이들의 정모 장소였다. 비에 젖은 우산과 머리를 털고 들어서자, 축구 선수 웨인 루니(Wayne Rooney)를 닮은 쑥색 야상 점퍼를 걸친 남자가 벌떡 일어나 내가 앉을 의자를 챙겨 주었다. 그는 자신이 히드로 공항에서 근무하는 회계사라고 열심히 설명했는데, 아무리 봐도 근처 마트에서 일할 것 같은 복장이라 믿기지 않았다. 우리는 이름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넘버 5’ 샴페인 바로 자리를 옮겼다. 도착해 보니 그와 나뿐이었다. 다른 이들도 분명 같이 나왔지만, 어찌 된 영문인 줄 몰랐다. 그는 내게 연락처를 물어보았고, 나는 뒷자리 한 자리를 일부러 틀리게 알려줬다.
그런데 그가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기가 울리지 않자, 그는 다시 확인했다.
“어머, 뒷자리 한 자리가 잘못 눌렸네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숫자를 고쳐줬다.
내향적인 그가 나에게만 연락처를 물어봤다는 건, 어지간한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나중에 들었다.
그날 이후 연락이 없어,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윈저에서 태국 페스티벌을 하는데, 시간 되면 같이 가요.”
이발을 하고,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마치 런던 금융가로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국에 대해 잘 몰라 갈 곳을 찾느라 고민하다 보니 연락이 늦었다고 했다. 결국 페스티벌을 찾아냈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이 마치 미소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미소년이 아니라, 미련 곰탱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며 책을 사서 읽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나에 대해, 나의 나라에 대한 궁금해하는 만큼 나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