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젠틀맨이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냥 맨들이 존재했다.
영국 남자의 보편적인 인상은 축구 선수 웨인 루니(Wayne Rooney)였다. 키 큰 루니, 키 작은 루니, 뚱뚱한 루니, 마른 루니가 존재한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나에게 영국을 대표하는 남자는 <노팅힐>의 휴 그랜트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 같은 긴 기럭지를 꼬고 앉아 우아하게 홍차를 즐기며 무심한 듯 책장을 넘기는 이미지였다. 그런데 이 루니들이 나의 환상을 모두 깼다. 여자는 백마 탄 왕자를 꿈꾸지만 실제 결혼은 자신이 탈 백마를 끌고 오는 마부와 결혼한다고 했던가?
그는 매주 계획을 세워 연락했다. 나에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계획 때문에 나를 만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일이 없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는 우리 집 근처에 야시장이 서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다양한 액세서리나 골동품 같은 것을 구경하자고 했다. 안틱 미니워쳐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 나에게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액세서리를 사주려나?’
라는 생각이 들어 미소를 지었다. 영국에서 밤 시간에는 혼자 돌아다니지 못했던 상황이라 밤길을 지켜줄 누군가와 야시장이라니, 흥미를 끌었다. 그는 영국의 대부분의 야시장은 먹을 게 없으니 저녁을 단단히 챙겨 먹고 나오라고 했다. 빈대떡, 떡볶이, 순대, 라면, 우동 등 한국 야시장 하면 먹는 것부터 떠오르는데, 먹을 게 없는 야시장이라니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8시경 집 앞 야시장에서 만난 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볼거리가 많을 거라고 생각한 야시장은 멕시코 타코, 바비큐, 스페인 파에야 등 먹는 것만 팔았다. 계획대로 진행이 안 되면 당황해하고 일이 계속 꼬이다가 결국엔 성질을 내다가 내가 버럭 하면 “미안해”라고 마무리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결국 내가 앉아서 맥주나 마시자고 했고, 그도 미안함을 넘어 긴장이 풀린 듯했다.
영국 맥주 종류는 크게 에일과 라거로 구분된다. 기네스는 나이 든 할아버지들이 주로 마시는 에일 종류로 인식되어 여자나 젊은 세대는 선호하지 않는다. 나는 기네스를 한 파인트 주문했다. “아유 슈어 (Are you sure)?” 물어본다.
“키 작은 사람은 한 파인트 못 마신다는 건 편견이라고. 호빗들도 술은 잘 마신다고.”
이안은 크게 웃으려다가 내가 ‘웃기만 해’라는 눈빛으로 쏘아보자 입을 오므렸다.
그는 현재 일하고 있는 히드로 공항의 다섯 개 터미널 상점의 수익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얼마나 많은 가게들이 들어와 있는지, 어디가 제일 수익이 좋은지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도망쳤어야 했다. 그가 손익과 엑셀 스프레드시트 이외의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스프레드시트 이외에 관심 있는 게 있어?”
“응. 은주베어* 너”
말을 그냥 흘려들었어야 했는데 프러포즈로 알고 설레었다.
“이안! 여기서 뭐 해? 이 여자는 누구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키도 큰데 높은 힐까지 신은 여자가 맥주 한 잔을 들고 자연스럽게 우리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나도 이안도 적잖이 당황했다. 이안은 봉사 단체인 ‘Rotary International’ 클럽의 회원이었고, 그녀도 같이 활동했던 사람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다들 여기서 뭐 해?”
“오늘 이안은 못 온다고 했잖아?”
또다시 두 명이 합세했다. 그렇게 한두 명이 합석하더니, 자그마치 8명의 여자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그날은 로터리 클럽 OB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나를 평가하는 듯한 16개의 호기심 어린 눈이 부담스러웠다. 9대 1의 이 남자도 버거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미련곰탱이는 로터리 클럽 모임이 우리 동네 야시장에서 열린다는 것을 미리 확인하지 않고 선약이 있어 참석 못한다고 했던 것이다.
완벽해 보였던 데이트 계획을 8명의 수다스러운 여자들 때문에 망쳐버린 그가 풀이 죽은 채로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일어섰다. 집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심리학에서 여자가 남자를 안쓰러워하면 같이 살 확률이 높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날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나의 마음을 움직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착한 루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어설픈 루니였다.
*이안은 애칭으로 나를 은주베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