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선생과의 데이트는 왜 끝났을까

by 은주

런던 아이를 출발하여 템즈강을 따라 야경을 구경하며, 타워 오브 런던을 기점으로 한 바퀴 도는 3시간짜리 선상 데이트였다. 여자 50명, 남자 50명.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싱글들이 있다니. 그 밤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출발 전, 이벤트 주최 측은 여자에게는 자물쇠를, 남자에게는 열쇠를 나눠주었다. 이후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다가가, 서로 맞춰보자고 말을 건넸다. 자물쇠와 열쇠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단순한 매개일 뿐, 실제로 서로 정확히 맞을 확률은 거의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낯선 남녀가 처음 말을 건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물쇠와 열쇠 같은 장치가 없었다면, 말조차 걸기 힘든 사람들이 만나 연애하고 결국 결혼까지 이어진다. 이 모든 어려운 시험에 통과한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한 남자가 “끝날 때까지 맞는 사람 없으면 나랑 데이트 한 번 하자”며 불편한 농담을 던졌다. 기자라기보다는 사기꾼처럼 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런던에서 집까지는 한 시간이 걸리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기꾼 같은 기자를 어두운 밤길에서 보니 더욱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이를 어쩌나’ 싶던 순간, 배 위에서 불꽃놀이를 함께 보며 잠깐 대화를 나눈 A가 나타났다.

"괜찮아요?" A가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그 순간, 내 팔을 낚아채려던 기자가 섬뜩한 표정으로 A와 나를 노려 보았다. 그의 눈을 피하며 뒷걸음질 치다 가방을 떨어뜨렸다. 안에 있던 휴대폰과 소지품이 도로 위에 나뒹굴었다.

“밤이 깊었으니, 지하철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떨어진 물건들을 수습해 주며 A가 다정히 말했다. 밝은 금발 머리에 학생처럼 생긴 그는 배낭을 메고 있었고 슈트 차림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 단출한 복장이었다. 스스로도 느꼈는지, “제일 좋은 청바지를 꺼내 다려 입고 왔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모습이 솔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 함께 걷는 길에 그는 아까 그 남자가 괴롭혔냐고 조용히 물었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 같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자신이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고, 그리니치에 살고 있으며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일단 직업과 첫인상은 통과였다. 그는 젊은 사람답게 바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방학이라 시간이 많다며, 다음날 회사 근처로 찾아오겠다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내가 나이가 많을 것 같아. 마흔 하나 거든.”

“휴, 열 살 위아래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동양인의 나이를 잘 예측하지 못하는 영국인답게 놀란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맘에 안 들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지요?”

운전 면허증을 보여주자, 그는 "엄마 거 들고 왔냐"며 농담을 던졌다. 그 밤, 그와의 짧은 대화는 유쾌했다.


나는 그를 세 번은 만나보기로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부터 그는 갑자기 어설픈 일본어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말로 고쳐서 가르쳐 줘도 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이 거슬렸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민감한 문제인 식민 지배가 한국을 일본처럼 발전시켰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의 전 여자친구가 일본인이었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아마도 내 앞에서 자신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관심도 많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을 동일시하며 한국은 일본어를 사용하냐고 물어봤다. 한국을 얕잡아보는 듯한 예의 없는 태도가 느껴졌고, 불쾌한 감정이 스쳐갔다. 그가 역사 교사라 역사에 관심이 많았지만, 왜곡된 시각으로 동양의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데이트는 무의미했다.


외국인과의 연애에서 종종 겪는 갈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주제가 아니라 나의 나라와 역사에 관한 문제였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내가 한국인이구나'라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평소에 소위 ‘국뽕’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 혹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같은 순간에는 우리는 작지만 강한 나라야라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영국인들과 수다를 떠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소소한 애국심이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가 정말로 나에 대해 궁금했다면, 자신이 아는 역사를 일방적으로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먼저 물어봤어야 했다. 그는 몇 차례 사과하며 연락을 시도했지만, 나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스피드 데이트에서 만난 모리셔스 출신의 영국인, 아이가 둘인 사실을 숨기고 연락한 독일 출신의 엔지니어, 소믈리에 코스에서 와인을 마시며 만난 금융인까지... 지난 반년 동안 내가 싱글로 남기를 원했다면 절대로 겪지 않았을 감정들을 맛봤다. 이러다가 ‘혼자 늙고 싶지 않다’가 아닌 '혼자 잘 사는 법' 책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정들이 쌓일수록 "내가 이대로 싱글로 살아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데이트' 대신 '드라마 한 편'에 오징어 뒷다리 뜯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다시는 데이트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주 금요일, ‘일 끝나고 윈저에서 만나’ 모임의 주최자인 술라로부터 문자가 왔다.

‘넌 올 거지? 비가 와서 다들 못 온다고 해서 걱정이네.’


FB_IMG_1745962340274.jpg


keyword
이전 03화무조건 세 번은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