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액션플랜 중 가장 지키기 어려웠던 것은 마지막 ‘무조건 세 번은 만나자’였다.
영국에 본사를 둔 H은행 유럽 본부 이사와 소개팅 날짜가 잡혔다. 사실,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몇 번의 거절 의사를 밝혔던 소개팅이었지만, 편견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주선자인 H은행을 다니는 후배 S가 내가 와인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그에게 흘렸고, 그는 와인을 즐기기 위해 자가용 대신 기사가 있는 리무진을 빌려 나를 픽업하러 왔다. 그가 예약한 템즈 강가의 3층짜리 레스토랑은 은은한 조명 아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강물은 달빛에 반사되어 부드럽게 반짝였고, 테이블 위의 촛불은 따뜻한 빛을 발하며 공간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다른 종류의 설렘에, 로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나는 적당한 가격대의 프랑스 와인을 골랐지만, 그는 웃으며 그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주문했다. 내가 좀 더 어렸다면 그의 재력이 멋지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의견을 무시하는 마초 같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와의 만남은 후속 이야기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소설처럼 느껴졌다. 후배 S는 며칠 후 전화해 보스가 밥을 사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먹어도 괜찮은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먹지 마!”라고 말하고 싶었다. 결국 ‘세 번은 만나보고 결정하자’는 결심은 하루도 채 가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연간 감사가 시작되었고, 일이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두 번째 데이트는 날짜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다. 새로 온 외부 감사 팀장이 인도 출신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나는 종교적인 이유로 인도 사람과의 만남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힌두교를 믿어야 한다면,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새로 온 감사 팀장의 얼굴을 본 순간 편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딩동' 힌두로 개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따뜻한 눈빛과 오뚝한 콧날은 인도 영화의 주연 배우처럼 보였다. 그가 가리킨 숫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정갈하게 다려 입은 그의 와이셔츠에 눈길이 갔다. 보통 감사 때는 운동복 바지 비슷한 걸 입고 다녔는데 슈트를 입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자료를 주러 가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고, 종교에 대해서도 “힌두는 모든 신을 믿으니 예수님도 믿을 수 있다”는 다정한 말이 나를 안심시켰다.
감사가 끝난 후, 업체 담당자와는 만나지 않는다는 룰을 깨고 약속을 잡았다. 저 멀리 템즈강이 보이고 가까이는 세인트 폴 성당이 있는 루프탑 바에서 만났다. 추워 보이는 나를 위해 그는 코트를 걸쳐 주었고, 높은 힐에 휘청거리며 걷는 내게 손을 잡아 주었다. 키가 크고 탄탄한 몸매에 춤 실력도 수준급인 그는 공간을 지배하는 듯했다. 그가 춤을 출 때마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면서도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게 퍼졌고 내가 우스개 소리를 할 때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이 한 번은 뒤돌아볼 법한 외모의 그가, 나와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기도 했다.
그는 여자 친구가 많다는 말을 주저 없이 했고, 나도 여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잠시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가볍게 받아쳤다.
“내가 너의 여자 친구가 되면, 그 여자들하고는 다 정리할 수 있어?”
그는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마음이 동요되었지만, '바람둥이의 나만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을 믿기에는 나는 너무 이성적이었다. 그의 말이 나에게는 가벼운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마 동양인과의 연애에 호기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를 믿고 미래를 걸기엔 마흔이라는 나이가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스스로 약속한 세 번의 데이트 후 그와의 만남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돌아보면, '이 인간이랑 평생 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 인간이랑 한번 실컷 놀아볼 걸', 후회도 된다. 그때는 왜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했을까? 좀 더 덜 진지하고, 즐길 수 있었던 순간들이 많았을 텐데.
두 번의 감정적 소용돌이에 지쳐 있던 중, S가 생일 선물을 보냈다. 처음에는 카톡의 이모티콘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싱글들을 위한 선상 데이트 초대권이었다. 나에게 지치지 말고 다시'파이팅'하라는 응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