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교내 백일장에서 대상을 받으며 처음으로 글쓰기에 자질이 있다는 어설픈 자부심을 가졌다. 단상에 오르는 순간은 긴장되고 설렜다.
학창시절, 개근상을 제외한 내가 받은 유일한 상장은 글짓기였다. 그때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작가는 배고픈 직업이야. 부자 집 딸들이 돈 써가면서 하는 직업이 작가야.”
엄마는 내가 그 꿈을 입 밖에 내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우리 집은 내가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 비용을 댈 수 없으니, 안정적인 직장인을 목표로 공부하라고 했다. 나는 현실을 택했고, 글쓰기는 35년 넘게 잃어버린 꿈이 되었다.
“퇴직하면 뭐 하고 싶어?” 정년을 준비할 나이에 접어들자 남편이 물어보았다.
“나… 뭐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자신 없이 답했다.
“그럼,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어른이 된 후 받아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하루를 생각해 본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어. 근데 소질이 없어서 그만뒀어.”
남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글을 쓰면 되겠다. 퇴직하면 시간도 많으니 배우면 되지. 실력은 늘릴 수 있어.”
남편의 응원을 받으며 호기롭게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중 브런치를 발견했다. 작가 등록까지는 일사천리에 이루어졌다. ‘아직 녹슬지 않았어’라는 자신감도 잠시, 첫 글을 올렸을 때, 글의 완성도는 떨어지고 부끄러움만 남았다. 엄마와 유럽 여행 이야기는 마음에 그려지는 대로,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늘 부족했다. 남편과 만난 이야기와 소소한 일상들을 공유하자 구독자가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독자의 반응은 마음처럼 늘지 않았다. ‘좋아요’가 많지 않으면 실력이 없는 걸까? 무엇이 문제일까? 계속 생각하게 된다. 독자를 늘리는 게 순서가 아닌 실력을 늘리는 게 순서라고 맘을 다잡는다.
요즘 가장 큰 후원자가 된 엄마는 너무 빨리 싹을 없애버린 것에 미안함을 전한다. 글을 쓴 후로는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으로 상대의 생각을 이해한다. 마음이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상대가 되어 보는 연습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가장 좋은 글감이다.
공모전도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마음처럼 묘사가 쉽지 않고 전달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때처럼 천천히, 꾸준히 사랑하며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순간, 고교시절 백일장에서의 반짝이던 나와 만난다.
‘퇴직 후 글쓰기’라는 다시 쓰는 꿈. 이제는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말이 더 이상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서툴고 느리더라도,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내 삶을 완성하는 여정이 되었다, 투박한 표현으로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고, 다듬고, 위로받으며,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가끔 “작가가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마음을 스칠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뇐다.
‘난 이미 브런치 작가야.’
기회가 된다면 출간 작가도 되고 싶다. 브런치와 함께 시작한 꿈이라는 보물을 찾는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