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모르겠고, 하루하루만 즐겁게
2022-5-15 몸의 일기: 과배란 8일 차(마지막 주사의 날) 오늘은 3대를 맞는 날. 주사를 놓으며 실수가 좀 있었는데 내가 마지막 날이라고 긴장을 너무 풀고 있구나 싶었다. 사람의 뇌는 정말 이리도 빠르게 많은 일들에 익숙해지는 것에 또 놀란다. 슬슬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느낌이다. 조기 배란될까 걷는 것도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과배란 중 가장 중요한 주사를 맞는 날이다. 23:10 알람을 맞추고 졸린 눈을 비비며 주사 3대를 꺼냈다. 다른 주사는 거의 웃으면서도 맞는데 이놈의 데카펩틸이라는 주사는 피하지방 부자에 둔감한 나도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다. 제대로 90도로 찌르지 않았는지 피도 많이 나서 지혈하느라 알코올 솜으로 꽤 누르고 있었다.
2022-5-16 몸의 일기: 주사가 없는 날이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날이다. 어제 마지막 난포 성숙시키는 주사(일명 난포 터지는 주사)를 맞고 나니 아랫배가 더욱 무겁다. 큰 건 2cm짜리 난포가 6개나 있을 테니 그렇겠지 싶어, 오늘은 스쿼트도 쉬고 남편의 주문인 절대 안 움직이기를 실천했다. 종일 가만히 있으려니 도저히 좀이 쑤셔서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한 시간 산책을 다녀왔다. 아 이제야 소화가 좀 되는 것 같다. (나처럼 움직임이 많은 생활체육인은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날들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2022-5-17 진료 일기: 대망의 채취 당일. 배란돼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병원에 도착했다. (지난 5차에 조기 배란된 적이 있고 그 당시 크게 상심해서 일단 마음속에 최악의 상황을 준비하라는 백신을 한대 놨다.)
이 병원에서는 첫 채취인데 모든 과정이 세심하고 대기도 없어 마음이 편안했다. 친숙한 프로세스며 간호사님들의 안내 때문인지 원래 다니던 병원의 분원 같은 느낌도 있었다. 전원을 했지만 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혈관 부심을 가진 나는 자신만만하게 양팔을 내밀었고 단번에 수액을 달고 10분도 기다리지 않고 채취하러 들어갔다. 모든 시설이 깨끗하고 정돈된 분위기에 주치의 선생님도 미리 와 계셔서 마음이 더욱 놓였다. 배란이 돼버렸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취 선생님의 편안한 목소리에 나를 맡겼다. 최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숨을 크게 쉬세요라고 하셔서, 그 짧은 순간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배운 ‘퀘렌시아’를 떠올리며 19년 봄에 갔던 히말라야 산군을 떠올렸다.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숨을 두 번도 쉬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이번 차수는 류시화 작가의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여러 글귀에서 큰 도움을 얻었다. 한 문장이 한 책이 한 달의 나를 구해주다니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Querencia 퀘렌시아.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만의 작은 영역. 명상에서는 이 퀘렌시아를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에 비유한다.
한 시간 후, 오른쪽 아랫배에 통증을 느끼며 잠(마취)에서 깨어났다. 간호사 님이 오셔서 수액도 빼주고 추후 안내를 해주셨다. 그리고 7개가 채취되었다는 결과도 알려주셨는데 워낙 어지러운 상태에서 들어서 리액션은 제대로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상당히 놀랐고 안심했다. 0개도 대비하고 들어갔는데 7개라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눈이 핑핑 돌게 어지러운 정신에 대충 옷에 몸을 집어넣고 불안한 얼굴의 남편을 만났다. 결과를 듣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실감이 나면서 나도 비로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보며 남편과 내가 우리가 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주사실로 갔다. 항상 밝은 주사실 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반겨주셨다. 항상 씩씩한 카후나 씨가 허리도 못 펴고 들어왔다며 예쁜 얼굴에 인상까지 쓰며 위로의 말을 해주셨다. 약을 받아 좀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 보니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사지 않고 왔다. 바보. 채취 당일에는 마취 때문인지 뇌가 멈추는 느낌이라는 것 또 잊었다.
2022-5-18 몸의 일기: 채취는 끝났지만 신선 이식 준비를 위해 주사를 또 맞는다. 이제는 프로게스테론제 1대, 항생제 2알, 아스피린, 질정 투약. 시험관을 할수록 약이 늘어가고 있고 그 모든 약들에 익숙해진 내가 신기하다. 오늘 아침에 충격적인 몸무게를 보고 16시간 간헐적 단식을 하고 있다. 과배란만 하면 2kg가 찌는데 복수가 차지도 않는 내 몸은 왜 이렇게 무거워지는지 모르겠다.
2022-5-19 마음의 일기: 과배란 시기보다 힘든 것이 바로 이 배아가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아직 결과는 안 나왔지만 당연히 안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진짜 안 되는 것을 잡고 있는 것인가 싶은 생각이 계속 든다. 어젯밤에는 자려고 눕자마자 호르몬 탓인지 뭔지 서럽고 슬프고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당연히 잠도 설치고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배란 주사 맞을 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은데 나는 왜 채취 후에 이렇게 마음이 힘든지 모르겠다. 작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다. 영혼이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배란 이후에는 수영장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정말 죽을 것처럼 기운이 내려가고 마음이 힘들어서 수영하러 갔다. 다행히 수영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안 들고 물 안에서 날아가는 기분이다. 오늘 유일하게 평상심으로 보낸 한 시간이었다. 역시 불안은 수용성이구나. 수영하니 불안한 마음이 녹는다.
2022-05-20 마음의 일기: 평소엔 7시 전에 일어나는데 오늘은 10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확실히 프로게스테론의 영향인가 보다. 아침 주사와 저녁 질정까지 쓰고 있어서 이 호르몬이 나를 통제하고 있는 기분이다. 자주 멍하고 전체적으로 무기력하고 작은 것에도 우울해지며 온 몸이 뚱뚱 부었다. 채취 다음날 간헐적 단식까지 했지만 몸무게도 거의 줄지 않았다. 아침에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또 기분만 상했다. 내일 아침이면 이번 차수 결과를 듣게 될 텐데 마음은 벌써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일 실패하면 치킨에 시원한 생맥주나 한 잔 마시고 모두 잊을 생각이다. 그리고 모레부터 신나게 운동하고 앞으로 난임치료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봐야겠다. 몇 년이나 더 걸릴지도 모를 이 프로젝트에 온전히 매달리고 있으니 이것도 참 건강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금요일 밤이다.
2022-05-21 진료 일기: 6시에 눈이 떠졌다. 한 시간을 뒷 산에 가서 걷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이식하시죠? 원장님께서 이식 전에 진료실에 들러달라고 하셨어요.” 짧게 통화를 끝내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일단 오라고 하는 것보니 이식을 하긴 할 것인 것 같은데 진료실에 오라는 이야기는 분명 나쁜 결과에 대한 설명같다는 시나리오가 마구 써졌다.
얼마 전 책에서 배운 마음을 생각하자. 일단 샘을 만나서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자고 생각하며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다. 창밖으로는 여름이 시작하고 있다. 올해 들어 거의 처음으로 습한 바람이 불고 있다. 희한하게도 예전 병원에 갈 때보다 덜 불안한데 이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도 알고 싶다. 이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문제들에 너무 쉽게 큰 힘을 부여하고, 그것과 싸우느라 삶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가질 여유가 없다.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도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든다. 삶에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더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게 한다. 영적인 삶의 정의는 '가슴을 여는 것' 혹은 '받아들임'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셨다. 7개 채취해서 6개 수정이 되고 그중 1개는 굿, 1개는 오케이, 나머지는 오케이쉬라고 하셨다. 더 키워봐야겠지만 지금 봐서는 5일 배양으로 가기는 조금 어려워 보이니 오늘 이식을 하자고 하신다. 네! 하고 씩씩한 답을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배아 3개가 나를 보고 있었다. 아 3개구나. 선생님이 배아에 대해 설명해주시고 바로 이식이 시작되었다. 이식은 정말 간단하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그래도 최대한 릴랙스 해보려고 다시 마음을 내 퀘렌시아 히말라야 산군으로 보냈다. 내려오는 길 촘롱에서 짜이차를 마시며 보았던 산과 그때의 안심하는 마음을 잠시 생각했다.
선생님은 이식이 잘 되었다고 했다. 불안도가 참 높은 나인데 거참 이상하지. 신기하게 불안하지고 않고 떨지도 않고 이식을 마치고 뭔지 모를 미소까지 지었으니. 그리고 다시 한번 느낀 점은 우리 주치의 샘은 어쩌면 이 비인간적일 수도 있는 IVF를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나고 침대 맡으로 오셔서 이식이 잘 되었다고 해주시면서 진심을 담아 응원해주시는 것에 또 뭉클해졌다.
이제 10일 뒤 피검사 날까지 그냥 하루하루 평소처럼 똑같이 지내야겠다.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