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2022-05-22 내면 일기: (이식 2일 차) 프로게스테론 영향인지 또 늦잠을 잤다. 일어났더니 벌써 아침 9시라서 놀랐다. 빠르게 또 프로게스테론 한 대를 맞고 하루를 시작했다. 임신을 도와주는 이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올라가기만 하면 기운이 내려가서 저녁에 또 남편이랑 싸웠다. 나도 왜 이렇게 서럽고 서운한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남편도 억울한 표정만 짓는 하루였다.
이렇게 마음이 내 머리채를 잡으려고 할 때 스스로에게 처방하는 것이 있으니 소설이다. 윤성희 작가님의 <날마다 만우절>을 잡고 쭈욱 읽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효과가 나온다. 소설을 읽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 그 상처와 그리움과 처연한 감정들을 느끼고 나면 나의 현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내 이야기를 비틀어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남편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남편에게 가끔은 조금 덜 딱딱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게 된다.
2022-05-23 몸의 일기: (이식 3일) 어제 먹는 양을 조금 줄이고 물을 아주 많이 마셨는데 그래서인지 부기가 빠진 것인지 갑자기 몸무게가 1킬로나 빠졌다. 은행 업무가 있는 날이라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했다. 지난 차수 같으면 그냥 집에서 눕눕(착상 시기에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는 난임 용어) 했을 텐데 이번 차수는 그냥 운동만 하지 않고 최대한 평상시처럼 살기로 했다.
일정을 끝나고 조카를 만나려고 기다리다가 최가을 님의 책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 중 한 구절이 생각났다.
<비커밍>을 보면 미셸 오바마도 시험관 시술 중에 힘들 때면 오빠네 조카들이랑 놀곤 했다는데, 인종도 국적도 다르지만 난임 시술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구나 하며 신기했다.
역시 첫사랑 첫 조카. 천진한 4살 조카와 소꿉놀이를 한참 하니 순수한 마음에 감동했다가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받아 내느라 또 피곤해진다. 아이와 노는 것은 생각보다 창의력이 매우 필요한 일이다. 다행히 최근에 읽었던 소설에서 끌어올 이야기들이 많아서 이런저런 작은 이야기들이 조카의 눈을 몇 번이나 커지게 만들었다.
2022-05-24 몸과 마음의 일기: (이식 4일 차) 보이차를 아주 아주 묽게 우려서 마시고 있다. 카페인은 좋지 않지만 몸이 하도 부어서 오늘의 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부기가 가라앉았다. 될놈될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긴 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목, 금, 토 여행 계획도 세웠다. 다음 주 화요일이면 뭐가 되었든 알 수 있겠지. 일주일만 신나게 놀자. 그리고 그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자.
출산을 앞둔 친한 후배와 만났다. 후배는 몸은 불편해 보였지만 어느 때보다 눈빛이 편안해 보였다. 신나게 수다를 떨고 집에 가자고 일어나며 후배에게 털어놓았다. 사실 임신한 친구들의 소식이 기쁘지만은 않다고. 그런데 네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와 비교하는 마음이 아닌 네 인생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에 정말 축하했다고. 너와 비슷한 시기에 나에게 임밍아웃을 한 친구에게는 축하하는 마음보다 그 소식으로 인한 상처가 더 컸다고. 이 기회로 네가 나에게 얼마나 존재 자체로 기쁨이 되는 친구인지 알게 되었다고. 30도의 여름이 시작되는 날에 만삭의 후배와 단팥빵을 나눠 먹으며 택시를 기다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2022-05-25 마음의 일기: (이식 5일 차) 올 1월에 시작한 심리상담의 마지막 회차에 다녀왔다. 4차부터 고조된 긴장과 우울이 5차에 터져서 시작한 상담이었다. 난임 관련 우울/불안 증상으로 시작했는데 내 근본적 성격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가장 크게 느낀 바는 나의 과도한 긴장과 강박적 성향이다. 그래서 불안도가 평상시에도 높은 편인 것이다. 스트레스도 잘 받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던하고 크게 동요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상담 선생님은 이 난임 기간 동안 내 마음속 긴장감을 잘 조절하는 것을 배운다면 미래에 좋은 엄마가 되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불안한 내 마음이 결국 아이에게로 갈 테니까. 마음을 안정적으로 지키려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번 기회에 생각해보니, 1) 아침 일기 쓰기, 2) 소설 읽으며 마음속에 다른 시점 넣어주기, 3) 글 쓰며 내 마음 알아보기, 4) 아침 수영. 이런 것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난임 기간 중 가장 큰 깨달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2022-05-26 몸의 일기: (이식 6일 차) 피검사 기간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득해서 몸이라도 바쁘게 지내려고 양양과 속초에 왔다. 역시 큰 바다를 보니 마음에 쌓인 피로가 녹아내린다. 2박 3일 동안 걱정하지 말고 눈앞의 멋진 풍경을 보며 초 여름을 누려야겠다.
2022-05-27 몸의 일기: (이식 7일 차) 이상하게 배가 많이 고프고 고열량(크림빵, 닭강정) 간식이 먹고 싶은 것을 보니 생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좀 울적해진 금요일이다. 역시 가장 가까운 남편이 불안을 알아채고 위로를 해주려고 했다. 저녁에는 남편이 다리까지 주물러주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줄곧 뻣뻣해져서 남편에게 고맙다는 소리 한번 못 했다.
2022-05-28 몸의 일기: (이식 8일 차) 오늘은 빵의 날이라고 해야 할까. 종일 빵을 먹었다. 어제까지는 이런 간식의 유혹을 잘 참았는데 눈 뜨면서부터 크림치즈빵의 그 촉촉한 식감이 떠올라 빵으로 시작하고 점심엔 시간이 없어서 대충 샌드위치. 저녁은 먹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배가 고파져 또 빵을 먹었다. 죄책감은 좀 들었지만 이제는 초여름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여름 햇살에 바람을 맞으며 달콤하고 짭조름한 바삭한 빵을 먹으니 입꼬리가 쪽 올라간다.
“잘 안돼도 너무 실망하지 마.”이 문장을 하루에 한 번씩은 하게 된다. 무표정한 남편이 나름 결연한 표정으로 바뀐다. 나도 남편에게 말하면서 스스로에게도 실패 후 너무 우울해지지 말라고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인데 진짜 효과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2022-05-29 몸의 일기: (이식 9일 차) 최대한 바쁘게 지내야지 생각하고 사적인 서점의 오전 책 읽기 모임에 갔다. 일요일 아침에도 다들 어딜 가는지 강변북로가 바쁘다. 일요일 11시에 맞는 적당히 느린 재즈를 들으며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를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또 크게 배운다. 맞다. 내 내면의 일기의 내용은 항상 똑같다. 불안하다, 긴장된다, 그리고, 후회한다의 반복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확실히 그것만은 아니다. 내 눈앞의 풍경이 바뀌고 계절이 날마다 다르고 들기는 소리도 변화가 많은데 나는 내 내면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곳만 보고 있었을까. 만지고 냄새 맡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확실히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더 느끼게 된다. 더 몸의 일기와 감각에 더 집중해야겠다.
2022-05-30 몸의 일기: (이식 10일 차) 내일이면 실패 여부를 알 수 있는 날이 왔더니 두려움이 내 숨에서 느껴졌다.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실패하면 무리해서라도 여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행책을 사러 교보문고로 갔다. 이 상황을 잊을 만큼 또 3년 만의 해외여행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싶어 좀 길게 걸어 걷고 집으로 왔다. 집 앞에서 시계를 보고서야 내가 2시간이 넘게 무리해서 걸었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다행히 오래 걸어서인지 어떤 꿈을 꾼지도 모르게 오랜만에 깊은 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022-05-31 몸의 일기: (이식 11일 차) 어젯밤 자기 전에 생리를 시작했다. 또 실패로구나. 기대를 안 했지만 가슴에서 뭔가가 뚝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간밤 꿈에서 누군가를 계속 쫓아다녔던 것 같다. 잠에서 깬 것도 아닌 상태의 몸으로 일어나서 피검사를 하러 가고 있다. 배가 사르르 아프다.
오후에 전화를 받았다. 임신 수치가 0으로 다음 예약시간에 내원하라고. 이렇게 7차를 마친다. 나에게도 성공하는 날이 오긴 할까 머리가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