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를 내보려고 쓰는 난임 기록
최근에 난임 생활을 하는 내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왜 이런 마음에 도착했는지 원인을 알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하지만 지독하게 알고 싶다. 다음번 마음에 전쟁이 났을 때 무엇이 나를 구해줄지 힌트라도 얻고 싶다.
물론 마냥 행복하거나 걱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매일 불안한 마음이 미간에 붙고, 한 밤 중 깨서 지금 현실이 남의 이야기인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잠들 수 있는 상태로 변했다. 5월 말만 하더라도 나는 꽤 칙칙했다. 무엇이 말해주냐 하면 남편과 싸움이다. 내가 내 인생과 좋은 사이가 아닐 때마다 남편과 자주 언쟁을 하게 된다. 그때는 거의 매일 싸웠다. 그런데 남편이 요즘 내가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5월 말부터 이 8월 초까지 약 2개월 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간도 결국 인풋에서 아웃풋을 출력하는 기계적 생물일 수밖에 없으니 내 인풋을 돌아보면 힌트가 있지 않을까? 일기장과 아이폰 사진첩과 독서기록을 헤집어보기로 했다. 나를 구해준 것들을 찾아보자.
6월
1. 김민철 님의 <모든 여행의 기록>의 문장 - ‘어떤 희망은 의무다.': 내 안의 낙관성이 계속 죽어가서 의기소침해져 있었는데 갑자기 이 문장이 나타나서 생명을 연장해주었다. 희망이 하나도 없는 나도 의무감으로라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문장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는 말을 실감했다.
2. 하와이 신혼여행: 코시국에 결혼을 해서 미루고 있었는데 과배란 주사 쉬는 달에 냉큼 다녀왔다. 약 10일 동안 내 현실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신나게 놀았다. 언제 내가 이렇게 신났었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5살 내 조카처럼 그야말로 신나게 놀았다. 이 시간이 나에게 참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해외여행을 갔다는 것보다는 시선의 변화가 있었다. 내 안에서 밖으로. 세상은 구경할 것 천지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내 한심한 마음에 빠져 다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억울했다.
7월
1. 칼 세이건의 딸 사샤 세이건의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에서 얻은 소중한 가르침들: 특히, 태어나기 전과 죽은 이후의 사이에 있는 이 삶의 시간은 그 시간들과 비교하면 참으로 짧다는 사실. 너무나 맞는 말이고 하와이에서 느꼈던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다시 한번 이런 책을 이 시기에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2. 김상욱 교수님의 말 '세상에는 죽음이 더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유퀴즈에서 들었다. 대부분 원자는 죽어있는 상태라고, 주위를 돌아보면 바위, 길, 테이블 모두 그렇다고. 난임 생활을 시작하고는 곧 잘 될 거라 생각했다.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리고, 무엇보다 자연은 강하고 생명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 잘되는 것이 아니라 잘되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 과연 잘 될까? 왜 나는 이렇게 생명력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기본 전제부터 크게 잘못된 것이었다. 기다리는 마음에 여유인지 위안 같은 것을 주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실감'하는 것은 크다. 내 마음은 남극에서 브라질 정글로 온 것 같다. 빙하가 녹아서 아마존 강으로 흘러온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정말 내가 생각한 인풋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시간이 지나서 내가 적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고차수(건강보험이 안 되는 10차부터는 대계 시험관 고차수라고 부른다.)를 대비하라는 뇌의 지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모든 것의 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지금 이곳의 나 자신을 무척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겠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무라카미 씨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말 그대로 지금 내 상황에 그대로 와 닿았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통하는 데가 있지 않나. 나도 지금 주어진 이 상황을 그저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살아가는 것도 괜찮은 마음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