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번째 독립 출판과 독립 출판 페어
모유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착한 부산.
새벽 04:00에 일어나서 겨우 머리만 감고 부산 가는 KTX를 탔다. 머리도 다 마르지 않았고, 주말동안 할 일도 다 마치지 못한 쫓기는 마음으로 부산역에 도착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뭘 하려고 하는 거지? 개념이 안 잡혔다. 짐칸에서 트렁크를 내리다 또 현타가 세게 왔다. 막 단유를 해서 양쪽 가슴엔 모유가 차서 아픈데, 늙은 호박*에 호박즙*까지 들어있는 트렁크를 내리다 가슴이 눌렸다. 우지끈. 예리한 통각이 또 묻는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집에 있었으면 밀린 일도 하고 몸도 마음도 편했을 텐데.
(*부스 명이 팀호박즙이라서 늙은 호박을 부스 데코로 이용하고, 책을 구매하신 분들께 호박즙을 증정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 이미 팀원들(친구들)이 부스 세팅을 시작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북페어 현장으로 향했다. "무신 트렁크가 저리 무겁답니꺼? 나 저리 무거운 짐은 처음 들어 보네." (부산 사투리)라는 말을 택시 기사님에게 들으며, 차마 '그 안에 늙은 호박이랑 호박즙이 잔뜩 들어있어서요.'라고 하진 못했다. 대신 "책이 좀 많이 들어있어요. 죄송해요."라고 했다. 그래도 허허 웃으며 말씀하시는 표정을 보니, 각박한 서울과 달라, 마음이 풀어지며, 휴~ 뭔가 새로운 곳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첫 독립 출판 = 부끄러움을 경험하는 일
어찌어찌 원고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책을 인쇄하긴 했는데, 누가 산다고 하니 기절할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분명 책을 팔러 온 건데, 책을 감추고 싶었다. 첫 책을 내는 건 이렇게 부끄러운 경험을 하는 것이구나. (독립출판을 하는 작가님들, 쉬운 건 줄 알고 쉽게 말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역시 남의 일은 다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쉬운 일이란 없다는 걸 또 배웠어요.) 그래도 다른 친구들 책 옆에 내 책을 놓고 판매하기 시작했다. 내 책이 아닌 것처럼 소개를 하기도 하고 내 책을 조용히 읽고 계신 분을 보면 어딜 읽고 계시나 빼꼼 보기도 했다. 다음 책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아니면 다짐이 올라오기도 했다. 잘 팔리는 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데 다른 부스가 핵꿀잼이다.
어디서 이런 숨겨진 보석들을 찾으셨을까?
간결한 연필선만으로 매력이 넘치는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님(https://www.instagram.com/drawing_table_/?hl=en), 밀리의 서재에서 봐서 이미 알고 있던 챈들러 님(https://www.instagram.com/chandlertoon/?hl=en), 단정하지만 창조적 에너지가 뚫고 나오는 주소영 님( https://www.instagram.com/natzam_/?hl=en), 실패도 쌓이면 보물이 된다는 해피실패클럽(https://www.instagram.com/happyfailclub/?hl=en), 눅눅한 식감을 좋아하는 김눅눅 작가님(https://www.instagram.com/kim.nuknuk/?hl=en), 팀불독(불타는 독립출판), 현재 내 기준 대한민국 센스 1번 독립출판사 발코니(https://www.instagram.com/kim.nuknuk/?hl=en), 그리고 얼굴과 작업물은 기억나는데 미쳐 명함이나 인스타를 챙기지 못한 부스들까지.
부스마다 매력이 퐁퐁 터졌다. 창작자들의 눈빛은 또 얼마나 생기 넘치는지! 분명 이 작업물로 생계를 전부 책임질 만큼의 경제적 보상은 없을 것 같은데도 활기가 대단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명랑함이었을까?) 알려지지 않은 멋진 창작자들이 이렇게 많다니! 수면 위로 올라온 창작자들(예를 들면 교보문고에 가면 볼 수 있는)만 접하고 살았는데, 수면 아래 이렇게 멋진 세계가 있었구나. 내가 느끼는 이 흥분된 기쁨은 꼭 스노클링 했을 때 느낀 즐거움 같았다. 뭐가 있을까 싶게 잔잔한 수면 아래로 알록달록 열대어, 산호, 거북이, 돌고래까지 보는 기쁨을 누렸다.
도파민 대폭발, 팀호박즙
내 책을 냈다, 페어에 나왔다는 성취감에 '첫'이라는 시작의 도파민이 가세했다. 혼자보다 여럿이 성취하는 것이 훨씬 신나고 즐거움의 깊이가 깊었다. 나도 기쁘지만, 신난 동료를 보는 건, 그건 정말 살맛 나는 일이다. 그래서 내년 페어를 위해 두 명을 더 영입했다. 함께 쓰고, 함께 책을 내고, 팔고, 추억을 쌓는 것, 혼자보다 훨씬 신나는 일이다. 이 기쁨을 아끼는 사람들과 더 나누고 싶었다.
쓸데없는 일의 쓸데 있음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다시 부산역. 글쓰기 동료 마틴 님과 커피를 사러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또 기차에서 일기를 써야 하고, 아메리카노가 없이는 한 글자도 쓸 수 없다.) 불현듯 어제 부산역에 도착했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다른지 느껴졌다. 쫓기고 있지 않았다. 다음 책을 구상하고 있었고, 다른 창작자들에게 내 작업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불과 1박 2일 만에 나에게 새로운 자아가 추가되었다. ‘창작자’(아직 가소롭지만 다른 말이 없네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닌데, 나 여기서 뭐 하지 불평하던 어제의 나였다. 그런데 지금은 현생은 모르겠고 친구랑 뭐가 재밌다고 별거 아닌 걸로 낄낄거리고 있다. 얼마 전부터 마음이 지쳐가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회복된 기분이었다. 사람은 쓸데 있는 일만 하면 지쳐버리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압박도 없고, 망쳐도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이번 주말 자유로웠다. 생필품만 있는 각박한 집에 그림을 한 점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이번에 부산에 와서 생긴 ‘창작자’라는 자아의 시작이 기대된다. 대단한 실패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정말 쓸데없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되겠지만, 생각만 해도 즐겁고 엉덩이가 들썩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