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미술’ 전공으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재주가 좋으시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플라톤에서 바움가르텐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읊으며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려 시도했지만 무익한 노력이었다. 나는 곧 미학도를 자처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철학을 전공한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손금을 보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무어라 설명하기도 피곤한 노릇이어서 독본을 한 질 구해다 놓고 수상(手象)의 대략을 파악했다. 사람들의 손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재미를 붙인 나는 후에 관상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덕택에 썰 풀기 좋은 지식이 갖추어졌다.
대학원생이 될 무렵에는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제법 개선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세부 전공이 문제가 되었다. 손금을 보아주는 데도 지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철학을 모른다고 할 수는 있었지만 정치를 모른다고 하면 대번에 난리가 났다.
몇 달을 고생하던 나는 “철학이 없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라는 점잖은 답변을 개발해 냈고, 이를 들은 사람들은 퍽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대한민국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번은 외부에서 서류를 받을 일이 있어 ‘인문대학’ 철학과 사무실로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입문대학’ 철학과로 보내준 일도 있었다. 딴에는 괜찮은 작명인 것 같다고 생각하였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이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었다. 학령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는 대한민국의 희극이다. 대학교에서 인문학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지라 앞으로는 또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고등교육의 르네상스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지만, 이것도 역사의 일부이다. 2020년에 철학도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한 줄의 문장만이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