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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0. 2024

철학도, 2020년 서울

미학을 공부한다고 말하면 ‘미술’ 전공으로 알아들은 사람들이 “재주가 좋으시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플라톤에서 바움가르텐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읊으며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려 시도했지만 무익한 노력이었다. 나는 곧 미학도를 자처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 나는 철학을 전공한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은 손금을 보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무어라 설명하기도 피곤한 노릇이어서 독본을 한 질 구해다 놓고 수상(手象)의 대략을 파악했다. 사람들의 손을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들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재미를 붙인 나는 후에 관상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덕택에 썰 풀기 좋은 지식이 갖추어졌다.

대학원생이 될 무렵에는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제법 개선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시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세부 전공이 문제가 되었다. 손금을 보아주는 데도 지친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철학을 모른다고 할 수는 있었지만 정치를 모른다고 하면 대번에 난리가 났다.


몇 달을 고생하던 나는 “철학이 없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의 문제”라는 점잖은 답변을 개발해 냈고, 이를 들은 사람들은 퍽 만족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대한민국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번은 외부에서 서류를 받을 일이 있어 ‘인문대학’ 철학과 사무실로 보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입문대학’ 철학과로 보내준 일도 있었다. 딴에는 괜찮은 작명인 것 같다고 생각하였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이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었다. 학령인구의 절반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는 대한민국의 희극이다. 대학교에서 인문학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지라 앞으로는 또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모르겠다.

고등교육의 르네상스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지만, 이것도 역사의 일부이다. 2020년에 철학도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한 줄의 문장만이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2020년 언젠가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Aaron Bu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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