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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0. 2024

국비유학 장학생이, 었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은 참으로 불완전하다.


그 일이 참… 십 년 전 이 때쯤이었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혀 어긋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제대로 기억이 났다.


나는 관악사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낙성대역으로 향하는 마을 버스를 탔다. 그해 여름이 무척 더웠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땡볕이었다. 버스 맨 앞 자리. 운전석 맞은편의, 늘 앉는 자리에 엉덩이를 걸치자 안경에 훅 김이 서렸다.


어쩌면 안경에 서린 그 김 때문에 그것이 한겨울이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한여름을 한겨울로 기억한 것은 좀 너무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쩌겠는가.


기억이 불완전한 것을.    




십 년 전 여름, 나는 국비유학장학생이 되었다.


오래 바라보고 간절히 준비했는데, 왜 막상 결과 앞에서 기쁘지가 않았던 것일까. 어쩌면 이미 무언가 좋지 않은 암시를 느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식의 촉각이라면 이미 지겨울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그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은 탓이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유학 간 학교에 등록한 시점부터 장학생이 되는 것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겨우 장학생 ‘후보’가 된 것이다. 아직은 과제가 많았다.


그러나 그 개운치 못한 암시는 곧 현실이 되었다. 돈이 없어서 장학금을 받겠다는 내게 그들은 두 명의 연대보증을 요구했다. 아직 법을 공부하기 이전이었지만 그 대략의 의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문제가 생길 경우’ 장학금만큼의 돈을 대신 토해낼 인물을 구해오라는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이나.


그래… 그 찌뿌둥한 느낌은 실체가 없는 느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금액을 시원스레 보증해 줄 지인이 두 명씩이나 있다면 내가 미쳤다고 장학금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정신이 나갔다고 수천 장이나 되는 서류를 짊어지고 여기까지 땀을 열 바가지나 흘리며 왔겠냐구요. 돌았다고 이 삼복 더위에 정장 차림으로 반나절 동안 면접을 했겠어요? 말씀 좀 해보세요, 선생님.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안내하는 ‘선생님’은 기껏해야 사무관이나 되어보이는 공무원이었고, 설사 그가 정의와 패기에 넘치는 젊은이였다 한들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그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거니와.


“요즘 잘나가는 마이클 샌델 교수님 밑으로 들어가려고요.”


무의미한 자기소개가 시작되었고, 나는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맥빠진 말투로 지껄였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내 말을 고급진 농담으로 알아들은 합격생들이 와아 웃었다. 그 자리에서 연대보증 따위에 낯빛이 어두워진 것은 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시 5만불은 큰돈이었다. 호기롭게 소개 인사를 싸질렀던 나는 뒤늦게 미련이 생겨 지푸라기를 찾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차라리 평소처럼 뻔뻔했으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는 하필 잘 하지도 않던 사과를 했다.


“그걸 받아온 것은 고맙다마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뭐가 고맙다는 것이고 이제 와서 뭐가 미안하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뭔가를 더 알고 싶은 마음조차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십 년 전의 일이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반면 평가적으로는…


정확히는 저 일이 있고서 한 해가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여전히 자포자기한 심정이었고, 몇 번인가 죽어보려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 뒤였다.


대체 내가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건 뭔가.


나는 신림동의 습한 원룸에서 목놓아 울었다. 언제나처럼 빤이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로.


그리고 내 영혼의 바닥이 거의 보이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아내를 만났다.


“음악은 미술만큼 좋아하지는 않지만요…”


아직 아내가 아니던 시절의 아내가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와 ‘음악을 미술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두 명제는 분명 양립 가능하니까.


내가 그 간단한 논리를 이해하지 못해 쩔쩔매는 동안 가을이 찾아왔다. 부드러운 계절이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었다.



Posted on Instagram at 26 Feb 24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Alexander M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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