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입니다만....
결혼을 했으면 아이는 당연하다는 생각은 왜 때문인가요?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 있겠으며 아이를 생각한다고 낳아야겠다고 다짐한다고 생겨지는 것인가요. 아니 설령 그렇다한들 부러움을 이유삼아 아이 낳기를 권면하다니요...
결혼이라는 이벤트를(결혼식, 혼인신고) 거치고 혼자보다 알뜰하고 찰지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는 생각만 수억 번 하고도 행동으로 옮길까 말까 했던 것들을 결혼을 하고 함께 사는 동거인 남편으로 인해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보거나 내키지 않으면 해보지 않을 것을 하고 내 삶에 대해 더 깊게 들여다보고 살았다.
소소하게는 강아지를 기르는 것, 자전거로 여행하기, 새벽 밤거리를 두려움 없이 걷는 것부터 크게는 사표 쓰는 것, 제주로 이사하기, 주택에서 살기같은 것 말이다.
나는 결혼생활에 정말로 만족감이 컸다. 드라마같은 낭만은 없더라도 늘 내 곁엔 친구가 함께 했고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나와 겪으며 삶을 나누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결혼을 한다고 꼭 아이를 낳아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또래들이 많다. 그들은 삶에 만족했고 결혼생활을 둘에게 더욱 집중해서 살 수 있어 행복하다 했다. 나의 ‘원함’으로 인해 세상물정 모르고 생명을 얻고 태어난 아이에게는 이기적이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결혼은 좋지만 아이에게 시간과 노력이 뺏기는 게 싫고 삶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것 같고 그것은 싫어서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결혼을 이유로 아이를 무조건 낳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다만 남편을 닮은 귀여운 아이를(더 구체적으로는 아들을)실물로 확인해보고 싶은 정도의 마음은 있었고 지금까지도 오지 않는 그 아이는 가상의 인물로 내게는 비현실적이고도 막연한 아이였다.
서울에서 우리는 각자 열심히 일했다. 결혼식도 혼수도 집도 작고 작은 예산을 쪼개며 상의하고 형편을 나누며 신혼을 시작했다. 빤한 처지를 서로를 감싸주고 보듬어가며 오늘도 열심히 일에 대한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삶의 만족감이 높아질 지 연말이면 가족 단합대회를 하고 가족회의를 앞세워 회식도 하는 부부사이였다.
결혼 4년 차엔 그런 의미에서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컸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얼음이 되었던 도시생활이 골목길 어른에게 인사를 건네는 편안함으로, 밭에서 무우를 뽑아 대문 앞에 놓아주시는 시골의 푸근함으로 느껴져 더 좋았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권태로움은 없었다. 그러니 아이가 있어서 좋겠다, 부럽다같은 생각이 들 틈이 없었다.
아이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은 또 아니었다. 나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는 편으로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기고 스며들길 바랐다. 부러우면 하나 낳아보라는 식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 조언은 기분이 쓰기까지 하다.
아이가 없는 결혼 생활앞에 가깝게는 가족, 친구부터 제주에 와서는 호기심 많은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묻는 새로 생긴 이웃, 동네어른, 처음 뵙는 가게 사장님 등 많은 사람에게 '왜'아이가 없는지 찔러보기식 질문이나 '언제' 낳을건지 나도 모르는 계획을 질문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은근 스트레스다. 내 기분을 의식하듯 은근 묻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면박을 주면서 '낳아야지!' '젊어서 나아야 덜 힘들어 빨리 낳아' '노력을 좀 해봐' '곧 생길거야 내가 요즘 기도하고 있어'
... 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과 따뜻한 위로와 조언 너무나 감사하지만 대화를 더 핑퐁할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한번은 더 이상 얘기하지 못하도록 '네, 그러게요.. 노력하는데 안생기네요...' 내지는 '난임이라서요...' 라고까지 오히려 나의 약함을 고백해도 '더 노력해봐야지' '나 아는 누구누구도 그래서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고....'
한번만 들으면 될 것을 괜히 그랬다싶게 내 마음의 상처만 더 깊어갈 뿐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와 함께 있는 또래 친구와 함께 있다가도 어른을 만나면 쥐구멍에 숨듯 자리를 이탈하거나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푸쉬형과 질문형도 스트레스였지만 '나 임신했어' '이렇게 빨리 생길 줄 몰랐어' '지금 낳아도 노산인데 어쩌냐' '하 둘째 생겨버렸어....' '첫째가 벌써 네 살인데 넌 지금 낳아도 한 살이다' 축하해달라는 소리인지 미안하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을 임신고백에 위축되는 나의 모습이 생겼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나라는 인간에겐 생기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생겨버린 다른 사람의 임신 이벤트에 나도 모르게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지는 것이었다.
나의 상황과 마음을 알고, 좀 더 긴밀히 아는 사람들은 내게 툭툭 내뱉듯 조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댁과 친정은 말을 아꼈고 둘만 건강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라는(기다림과 걱정을 넘어서 반포기 상태일지라도) 말로 마음을 다독여주고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외부적으로 스스로의 압박이 쌓였고 그런 무관심마저 오히려 화가 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이에게 재촉함은 무례함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노력만으로 될 수 없는 그것일 때는 더더욱..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다리고 마음을 아꼈다.
나의 잘못은 아니지만 나의 현실이고 나의 상황이기에 스스로에게 객관적인 시선은 거의 어려웠다. 나이에, 시선에 상황에 등떠밀리듯 시험관 시술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더 노력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면 보다 전문가의 손을 빌리고 싶었다. 부러워서가 아니라, 진정 나는 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