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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미 Oct 06. 2024

파도처럼 밀려왔던 책사랑(2)

엄마의 이야기

1936년 일본규슈에서 태어난 나의 엄마는 해방이 되자마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연락선을 탔다. 지독한 멀미 끝에 도착한 고국의 부산항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고,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없던 어른들은 그만 온 가족의 생활밑천을 꼭꼭 숨겨놓은 이불지게를 잃어버렸다. 그날 이후 충령대군파 자손이라는 자부심 만만하던 나의 외할아버지와 그의 식솔들은 거지 신세가 되었고, 마치 끝난 전장에서 다시 살아난 좀비 같은 지독한 가난에게 무참히 짓밟혀갔다.


1950년 6월 25알 발발한 또 한 번의 전쟁으로 엄마는 오빠를 잃었다. 마침내 총성이 멈추었을 떼, 9남매 중 여섯 번째 자식이면서 딸 중에 셋째인 엄마는 일을 해야 하는 자식과 공부하는 자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어린 동생들과 나란히 엄마를 앉힌 할머니는 물으셨다. "누가 학교에 갈래?" "......"  "......"

 엄마는 집에 남아 할머니를 돕겠다며 공부할 기회를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어리고 가볍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대담했던 엄마는 땔감을 찾기 위해 폐허가 된 적산가에 기어올라 벽이며 지붕이며 가리지 않고 떼어왔다. 전쟁으로 주인 잃은 빈집을 뒤지며 빈 쌀독의 바닥을 긁어왔고, 먹을 수 있는 무엇이든 들고 오면, 할머니는 해소기침 쉑쉑이며 뜯어온 판때기를 조각내 불을 지폈다. 그렇게 겨울을 견디면서 이름도 알 수 없는 죽을 끓여 식구들은 연명했다. 남의 집 아기를 봐주고 품을 받던 엄마는 어느 날, 업힌 아기를 달래려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발길이 멈춘 곳은 학교 앞, 엄마는 교실 창문 밑에 쪼그리고 앉아 공부 동냥질을 하다가 아기가 우는 바람에 들켜버렸다.


그러나 혼낼 줄 알았던 선생님은 오히려 등을 두드려 주시며 교실 한쪽 끝에 한참이나 앉아 있다 가게 하셨다. 엄마는 학교에 가는 동생들이 너무나도 부러워 가끔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가슴을 짓누르는 그 서러움과 답답함이 서서히 풀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로 책 읽기이다. 소설책을 얻어 읽기 시작했다. 엄마는 훗날까지 당시에 읽은 책들을 여러 번 언급하며 그날들을 회고했는데, 펄 벅여사의 '대지'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처지와 시름을 잊었다고 했다. 빨래를 하고, 물을 길어오고,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돌아와서도 그냥 잠들 수 없었던 아직 어렸던 우리 엄마에게 가끔 다른 일을 시키려고 급히 방문을 연 외할머니는 호롱불 아래에서 지친 몸을 일으켜 책 속에 빠져있는 딸을 보고 "아, 니 공부하나?!" 하며 문을 닫으셨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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