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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미 Oct 06. 2024

책사랑은 쉬지 않는 파도처럼(3)

우리가 받은 유산

엄마의 바로 밑 이모는 중학교, 막내이모는 고등학교, 삼촌은 대학교까지 마쳤지만, 엄마는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훗날, 나이 많은 남자가 자기에게 시집오면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큰소리쳤을 때, 요동쳤을 그 마음을 나는 짐작해 본다. 세월이 지나 엄마의 나이 많은 남편이 된 내 아버지는 외갓집의 빚을 갚아주고, 쌀을 팔아주고, 이모와 삼촌의 학비는 대주었지만, 딸을 셋 낳는 동안 엄마를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나와 동생들은 엄마의 십 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모두 남산 중턱에 있는, 노란색 교복을 입는 사립초등학교를 다니며 결핍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다. 화창했던 주말 오후 그날이 생각난다. 문을 두드리던 책 방문판매원은 마당에 들어서며 책 설명을 시작했다. 엄마는 그의 책 설명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소년소녀 명작동화'를 시작으로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거실과 내 방으로 차례차례 들이셨다. 딸들의 손에 한 권 한 권이 들릴 때마다 엄마는 흐뭇했다. 우리는 '플란다스의 개'를 읽고 훌쩍였고 '소공녀'와'빨강머리 앤'을 읽고는 서로에게 권하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마침내 엄마에게 들어서 익숙한 책들이 펼쳐지며 같은 책을 읽던 엄마의 그 옛날을 헤아릴 수 있었다.


희극보다 비극으로 더 많이 엉켜있는 엄마의 인생, 전쟁과 가난과 희망과 좌절로 파도치던 그 날들을 엄마는 써내려갔다. 이미 너무 많이 들어서 마치 본 것 같은 이야기부터 차마 우리에게 할 수 없었던 이야기까지 담겨있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펜글씨로 남겨주신 엄마의 자서전은 우리의 명작이 되었다. 나와 여동생들은 책사랑의 유산을 받았고,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에게 책을 읽어주며 변치 않는 평생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안내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면 좋겠다. 이야기 속에 담긴 동물들과 공주와 왕자, 마녀와 나무꾼은 아이들의 좋은 벗이 될 것이고, 그렇게 시작되는 잔잔하고 쉼 없는 책사랑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너끈히 감당하는 명작으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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