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은미 Dec 12. 2022

간만의 독서록

인생의 역사         신형철 시화


책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깊이 공감되는 글이나 대사를 만나면 행복하다. 가라앉았던 마음, 떠다니는 생각, 놓쳐버린 의식이 힘을 얻는다. 얼마 전에 아들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 '인생의 역사'를 보내주었다. '동서고금에서 산발적으로 쓰인, '인생 그 자체의 역사'를 담은 '시'를 소개하며 이어지는 평론가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의 아들은 종종 받은 감동이나 재미를 공유한다고 가족들 앞에서 제가 먼저 읽은 책의 몇 소절 혹은 몇 페이지를 읽어주기도 하고 아예 책을 건네기도 했었다. 덕분에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된 작가가 여럿이다. 아주 오래전에 아이들을 조르륵 모아놓고 누렸던 즐거움이 이렇게 진화했다.


몇 주 전 코로나 증상이 잦아들기 시작할 때 그러나 아직 격리 중일 때 책을 집어 들었다. '인생의 역사'는 시를 평론한 글이다. 나에게는 '인생'도 '역사'도 '시'도 '평론'도 쉽지 않지만 보내준 이를 믿고 책장을 열었다. '인생'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말이며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라고 평론가는 말문을 텄고 자신이 겪은 시를 엮었다고 했다.


책머리를 지나 찬찬히 프롤로그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멈추었다.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다니... 첫날은 그 이상 읽지 못했다.


격리기간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완독을 못했다. 소개되는 시마다 설명되는 내용마다 전해지는 울림이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나아갔다.


오래된 시 '공무도하가'를 관통하여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노래를 들려주더니 무죄한 이들의 고통을 대변했던 '욥'을 소개했고 '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이라고 노래하는 가장 처절한 이야기를 이상하리만치의 당당함을 잃지 않는 시로 위로했다.


그리고 2부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로 시작했다. 시간 속에서 늙는 것은 나나 그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닌가라고 묻더니 시인도 청년도 늙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이 늙을지도 모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삶을 더 사랑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신형철 평론가는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 몇 권 중 하나라며 릴케의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를 꼽았는데 나는 '절제'란 사랑이 탕진되지 않도록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일 것이라는 그의 말에 매혹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그것이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세라고 한 말을 귀담아 들었다.


책을 읽다 말고 연필을 찾았다. 내 기억력에 내가 낙심한 지가 오래여서 지금의 감동을 묶어놓을 줄을 긋기 위해서였다. 힘을 빼고 살살 밑줄을 치며 읽었다. 바통을 이어 읽기를 기다리고 있는 딸아이가 "엄마, 다 읽었어요?" 하고 물을 때마다 "아직."이라고 말할 때 좀 미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랑의 면'에 관한 통찰이 가득한 2부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3부 '죽음'이 나타났다. 김시습의 시와 소설 그리고 그의 인생 이야기가 아련하다. 김시습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면서 살아남은 자의 내면을 함께 생각했다. '죽는 사람이 있다면, 통곡하며 시체를 묻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또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라고 했다. 김시습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책을 나에게 보내주기 전에 아들이 폰으로 미리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라는 소제목 아래의 시와 글이었다. 시인'W.H 오든'의 '장례식 블루스'를 인용하면서 신형철 평론가는 농민 백남기 씨의 죽음과 그 죽음이 시작된 세월호(직접 언급하지는 않음)를 기억나게 했다. 산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미 죽은 사람도 다른 원인으로 한번 더 죽어야 하는 고초를 겪어야 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여기라고 말할 때 다시 깊은 좌절감이 몰려왔다. 죽은 사람이 아직 미처 다 죽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니 그 죽음에 합당한 애도는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는 그의 말이 최근 이태원 참사에 어김없이 복제되는 것 같아 분하고 원통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내 안의 여러'나'는 반복적으로 소통하는 이들에 따라 각각의 '나'가 되는데 그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 또한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이 나므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한 사람이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뻗어나가는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래서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고 했는데 '장례식 블루스'를 바라본 신형철 평론가의 시선에서 나도 동일한 경험을 했다. 몇몇 페이지는 온통 앞 뒤로 줄들이 빼곡히 채워졌다. 다시금 책장을 열 때 곱씹을 요량으로 그랬다.


완독을 하고 다시 줄 친 곳을 흘끔흘끔 넘겨보며 간만의 독서록을 쓰고 있다. 책의 반 정도를 다시 둘러보았을 뿐이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 책을 넘겼다가 다 읽은 딸과도 함께 수다를 떨고 싶다. 그러다가 나머지 뒷부분도 채워 넣어야지. 나에게는 여전히 '인생'도 '역사'도 '시'도 '평론'도 어렵지만 모처럼 가슴 떨림과 벅참을 선물한 소중한 책을 만나서 기쁘다.



 




















작가의 이전글 모카를 부르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