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다이 크리스차펠(1)
센다이.
아오바구 국제 교류 센터 원룸에서 짐을 푼 것이 1996년.
일본은 마을 안에 오하가 즉 공동 묘지가 같이 공존한다.
낯 선 마을을 따라 걷다 발견한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의 교회 하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만 해도 낯 선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랄까, 아니면 워낙 소극적인 그들의 민족성 때문일까.
아무 튼지 냉랭한 기운을 감지하면서도 들어서버렸던 기억.
한인 교회는 차로 가는 거리라 차도 없던 처지이고 , 또 왜 들 그런지 항상 한국인들은 모이면 갈등하고 싸우고 갈라서고,, 암튼 시끄럽다는 이유와 더불어 까껏 일어도 배울 겸 겸사겸사 두드리게 된 교회 가 크리스차펠이었다.
일본어....
가기 전에 일본 친구와도 배우고, 광양시절 회사에서 틀어준 방송 도 들었었지만.
현실은 들리지가 않았지만, 짐 속에 내가 싸간 EBS 일본어 교재와 교류 회관의 강의 수업, 그리고 깨알같이 단어를 적어 들고 나선 나의 어리리한 용기가 합쳐져서 어느 날부터인가 씨너지 효과는 배로 나타나기 전이었다.
나는 어딜 가도 일복이 많던 기억, 그 때도 어김없었다.
한두 번의 주일이 지나고 , 눈치로 눈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한 즈음, 물론 일본 유학생 부부와 몇몇의 한인 학생들이 잇긴 했었지만, 목사님 사모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마침 반주를 맡아하시던 반주자 께서 아파서 수술을 받러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30을 넘기며 어느 날인가 너무나도 우물 안 개구리가 돼버린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렇게 다시 음악은 일본 교회의 반주를 맡기 시작하면서 또 다른 기쁨으로 다가서기 시작했고 , 급기야 성분들과 같이 성가대를 만들기에 이른다.
카와카미 목사님의 설교는 감칠 맛이 났다.
아주 쉬운 특히나 자주 음식의 예를 들으시며, 침까지 삼켜가며 설교를 하시던 모습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고베 출신이신 목사님과의 또 다른 음악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시 언급할 것이지만..
오사카 출신의 마사코 사모님께서는 오르간을,, 나는 피아노를. 저 위의 사진 속의 목사님 따님인 모 짱은 키보드를, 나의 제자이기도 했던, 지금은 사모가 되신 리츠코는 솔로 찬양을 그렇게 우리는 음악으로 예배를 올리곤 했다.
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말이다
아이들 역시 그냥 교회 속에서 살며 일어를 익혔다.
지금은 돌아가신 유치부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던 사또 할아버지 샘, 가끔씩 그리운 분 들 중의 한 분이 시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30대 중반에 나는 침체되 가고 있는가 하던 생각도 부터 크리스차펠의 모든 성도들과 찬양을 하며 다시 내가 음악을 공부한 것에 대해 감사했고 , 지금도 그 추억들 을 가끔 떠올리며 행복해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