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밝히며 떠오른 해.
커튼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투명 구슬이 빛으로 찬란하다.
무지개 빛깔의 구슬 그림자는 더욱 신비롭다.
집안에 빛이 드니 사물의 윤곽이 선명하고 기분도 밝아진다.
우리가 사는 공간에 자연의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빛 속에서는 생동감 있게 만물이 살아 역동하고 어둠에서는 안식하며 활동을 위한 힘을 충전한다.
빛과 어둠은 상호보완의 관계다.
삶에 기쁨과 즐거움, 사랑, 행복, 희망, 평안 등은 빛으로 상징되고 슬픔과 외로움, 미움, 불행, 불안, 두려움 등은 어둠으로 표상된다.
인생에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한다. 신비다.
어둠에 직면하면 빛을 갈망하고 빛에 있으면 영원을 소망한다.
우리가 사는 집에도 두 가지의 빛이 있다.
자연이 주는 빛과 집을 가꾸는 마음의 빛이다.
삶의 고단함을 풀고 보듬으며 서로 의지하고 사는 집.
쉼과 사랑, 행복을 그 공간에서 가꾼다.
형편 따라 이사를 다녀도 떠나온 집은 추억이 되고 세월 지나 오래되어 낡아 헐어져도 머물며 가꾼 추억은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된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빛은 무엇일까?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사랑인 것 같다.
의지적이고 의도된 사랑이 아닌 불완전함도 이해하고 불쌍한 처지도 배려되는 사랑.
사랑의 빛이다. 그 사랑은 훈훈하고 따뜻하며 이해타산이 없다.
성서에도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빛으로 언급된 구절이 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 누가복음 1:79 -
이와 유사한 사랑을 표현한 팩션(Faction)이 있다. 백희성 작가의 "빛이 이끄는 곳으로"다.
가족이 없는 외로운 프랑스의 한 남자 건축가가 매입한 저택에 전주인이었던 여인이 찾아와 자신을 가정부로 집에 있게 해 달라는 애원을 한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그녀를 측은히 여겨 수락한다. 그녀는 노숙자와 걸인을 돕는 착한 사람이었고, 화재로 가족 모두를 잃은 후에는 실명까지 하는 시련과 비련의 여인이었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서로가 외로운 처지라 자연스럽게 의지하는 사이가 되고, 그는 화상으로 몸이 불편한 그녀를 배려해 집을 고친다. 예술미와 실용을 보완해 가며 가족과의 추억도 그녀가 생생히 느끼도록 그녀의 기억을 바탕으로 집을 꾸민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그의 집 대문 앞에 아기로 버려져 양자로 삼게 된 아들에게 훗날 전하기 위해 집에는 수수께끼 같은 장치를 설치한다. 그 장치로 인해 신비로운 빛과 어둠, 바람, 새소리, 나뭇잎, 풀, 꽃향기의 평화가 드나드는 집이 된다.
스위스의 수도원 건물이 개조된 요양병원과 프랑스의 저택을 소재로 하여 수수께끼를 풀듯 그들의 사랑을 추적해 가는 이야기 전개가 참신하고 흥미롭다.
애상하면서도 가슴 따뜻한 스토리다.
인간이 지닌 순수한 사랑의 빛이 애련하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마음에 와닿는 표현과 의미를 감상해 보자.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니 파리의 화려한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깜깜한 도시의 화려한 불빛은 기차가 속도를 내자 작아졌고 그것은 나를 배웅하는 날쌘 반딧불처럼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작은 반딧불.
실내등을 끄자 갑자기 창밖으로 밤하늘의 별빛들이 나타났다. 나를 위로하는 듯한 밤하늘에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서일까?
눈을 감으니 차가운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아주 여리고 미지근한 실바람이 얼굴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마치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문 또한 그랬다. 문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그 집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저택의 문 앞에 서면 그 집과 첫인사를 나누는 기분이 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의 표정과 닮은 존재, 그게 바로 대문이다.
강렬한 빛과 어둠이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그 안에서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따뜻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려왔다.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과 따뜻한 빛줄기 속의 안도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상한 곳이었다.
무심결에 던진 질문에도 그녀의 대답은 인자하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그녀의 편안한 답변에도 길고 어두운 복도가 가져오는 불안감을 어쩌지는 못했다.
화제를 돌려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해야 했다. 다른 표현으로 그녀에게 질문하면 그녀의 의중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이 주는 느낌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의 심적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약간의 거만함도 없는 그저 소박한 표정이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감금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의도된 접대일 수 있다.
세상 만물이 지나는 길, 길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무엇이든 흐르게 해주는 것이었다, 숲 속을 걸을 때도 가끔 멈추어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바람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 주는 길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는 세상에는 말로 전하기보다는 직접 보아야 하는 것이 더 많고, 직접 보는 것보다는 눈을 감고 느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고 했다,
얼마 만에 느끼는 고요함인가.
그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허둥지둥 바쁘게 살았는지......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는 인생이 정말 내 것이었는지.
먼지가 빛을 먹는 순간 빛의 비행을 하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깨우는 존재였다.
이 건물은 과거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새로운 삶을 부여받아 지금의 병원으로 되살아났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반짝거림, 그리고 잎새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나를 위로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이다. 하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한 번도 같은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워로 해온 하늘이다.
다른 하나는 '생각'이다. 사람의 생각은 경계가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도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잘 정제해 실현하면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위험한 도구이기도 하다. 선악과처럼 잘 쓰면 이롭지만 잘못 쓰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경건한 수도원에 들어오려거든 문을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잡고 정성을 다해 문을 열라는 의미였다.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자신의 만용으로 역사가 망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 공을 후대에 넘길 줄 아는 양심적인 건축가였다.
어떻게 이토록 예전의 모습을 잘 보존하면서 당시의 새로움을 완벽하게 담아냈는지 놀라웠다.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향기로운 보물 말이다.
와인빛 저녁노을이 서쪽 하늘에서 천천히, 강렬하게 지고 있었다,
처음의 두렵고 걱정스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전부 보이는 게 아니란다.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보면 세상의 진실을 찾을 수 있단다, "
천창에서 내려오는 빛에 눈이 부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목 뒤편으로 스며들던 따뜻함의 정체가 바로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단 위 천장 유리에서 내리쬐는 빛이었다.
그동안 내 믿음대로 작업해 왔던 건축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의 직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프랑스와에게 건축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었고 그녀의 기억을 지켜주는 안식처였다.
세상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다. 오래될수록 숙성되어 진가를 발휘하는 와인처럼 말이다.
집은 그저 돈으로 치부될 수 없다.
몇억짜리, 몇 평짜리 집으로 말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이 너무나 강렬하다.
그들이 자신의 아이에게 남기고자 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집안 전체에 새겨져 있었다.
프랑스와를 통해서 느낀 것은 불편하고 부족해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쩌면 저마다의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든 이들의 기억의 장소는 집이었다.
- 백희성, 빛이 이끄는 곳으로 -
사랑이 퇴색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 누가복음 11:35~36 -
*사진출처: 커버/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