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벤츠가 도착했다. 흰 와이셔츠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검정 바지 차림을 한 선글라스의 남자 기사가 재빠르게 차 밖으로 나온다. 검정 구레나룻 턱수염이 난 입가에 여유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들을 맞는다. 친절히 차문을 열어 준다. 차 안의 시트 색까지 까맣다. 그러나 깨끗하다.
올리브 나무마저 늘어진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벤츠는 천천히 오래된 로마의 유적 속으로 진입했다. 빛바랜 황토색과 회색의 옛 건물들이 차창 밖으로 스친다. 세월의 흔적 속에 아무런 인공적인 보수 없이 풍화에 깎이고, 일부 떨어져 나간 대로, 무너진 대로, 땅이 파인대로 너절너절 즐비해 있다.
고대의 옛 명성이 사라져 조금은 서글픈 듯도 한데 예전에 ‘우리는 이렇게 살았노라!’ 그때의 번영을 흔적으로 뽐내는 것 같기도 하다. 치장 없는 건물들 잔해엔 안쓰러움이 스미고 세월의 허무가 밀려든다. 제국의 흥망성쇠 사연을 머금고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드러내며…….
캄피돌리오 언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 앞에 섰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황제는 손을 들어 천하를 평정하고 말은 ‘휘이잉’ 힘찬 울음으로 내달릴 것 같다. 역동적이다. 그가 쓴 "명상록"에 비친 철인의 정관과 황제의 격무로 고심했을 인간의 애조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사고하는 철학자로, 황제의 위엄으로 별개의 이미지를 보였던 그, 그런 그가 세계의 모든 것은 ‘불’이라 했던가.
모든 것은 신적 세계인 영혼으로 관통하여 지배를 받고, 인간의 영혼도 그 유출물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자연히 그 영혼에 귀일 하게 되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모든 것은 신적인 이성에 의해 운명과 필연으로 끊임없이 생멸 변화한단다. 때문에 개개의 물건이나 사람, 그 이름과 기억도 필연의 운동 속에서 소멸되고 망각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라고.
그러므로 이러한 이법(理法)을 알아 신의 섭리를 믿으며, 외적인 어느 것에도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내적으로는 자유롭고 명랑하게, 그리고 조용하고 경건하게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란다.
그의 철학대로 역사는 움직인 걸까? 그토록 막강했던 로마제국은 흔적만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트레비 분수, 개선문을 본뜬 흰 대리석 벽화를 배경으로 거대한 한 쌍의 반인반수 해신 트리톤이 전차를 이끌고 있다. 그 위에 해신 넵투누스(포세이돈)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 있다. 말과 함께 존재하는 두 개의 트리톤 상 왼쪽은 격동의 바다를, 오른쪽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수원인 ‘처녀의 샘’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로마 병사들을 위해 물을 제공해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벽화 위에는 사계절을 뜻하는 작은 네 명의 여인이 서있고, 그 아래 넵투누스 옆에는 두 명의 키 큰 여인이 서 있다. 각각 ‘건강’과 ‘풍요’의 여신이라 하니 예나 지금이나 ‘건강’과 ‘풍요’는 사람들의 관심과 염원으로 영속한다.
주위의 거암 거석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온다. 그 물이 아래로 모여 연못을 이루는데,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하게 되고,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은 동전을 아낌없이 던진다. 동전이 수북하다.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인생을 살기엔 너무 아쉽다. 삶은 언제나 희망과 꿈의 연속이다. 여러 자태의 조각상을 깨우듯 물줄기가 어느 순간 힘차게 쏟아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환호하며 사진을 찍느라 찰칵찰칵, 흥겨움과 활기가 넘친다. 뜨거운 태양열에 달아오른 더위가 식고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조각상엔 조명이 켜진다. 사람들은 환성을 울리며 더 몰려든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분수 옆 스페인 계단, 계단의 낡은 턱에 앉았다. 그 옛 날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나도 사진을 찍었다. 세월은 흘렀고 그때의 주연 배우인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은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그려낸 아름다운 사랑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 가슴속에 낭만으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콜로세움, 콘스탄틴 개선문, 포로 로마로, 팔라티노, 바티칸 박물관, 성 베드로 성당, 시스티나 성당, '진실의 입'은 로마의 역사 지구와 관광 명소로 모두 옛날의 자취를 드러내며 인생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오래전 보았던 "쿠오바디스", "벤허", "글래디에이터" 영화의 배경이 되었고, 그 시대를 산 인물들과 일화는 소재가 되었다. 장황하고 긴박감 넘치는 그 시대의 이야기가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모습을 통찰케 한다.
로마, 인생의 뜨고(흥왕) 짐(쇠퇴)을 드러내며 부귀영화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그 허무의 귀결을 묵시한다. 인간이 입은 온갖 부귀영화가 '들의 백합화’ 보다도 못하다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까? 그래도 우리들은 늘 꿈꾸지 않는가!
인간의 선과 악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시기와 질투로 인간의 영혼은 어둠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신의를 버린 배신은 고통의 나락 속에서 증오와 복수를 번득인다. 그런가 하면 한 편에서는 삶의 품격을 상실한 방종과 타락의 교염한 웃음을 흘리고, 누군가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평화와 행복을 노래한다.
로마에서 펼쳐지고 그려졌던 변함없는 인간의 속성을 사색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올리브 잎 반짝이는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우러렀다. 흰 구름 한 점, 무심히 떠간다.
*사진-고아함***커버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