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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한 Sep 29. 2022

서른을 기다리며

토요 글쓰기 모임 [끄적이는 소모임] #7

22.09.28




서른.


십 대의 나는 서른, 하면 집도, 차도, 배우자도 가진 사람일 줄 알았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 어린 내가 고뇌하던 모든 고민들을 우습게 볼 줄 알았다. 더 이상 밤마다 뒤척이지 않을 줄 알았다. 앞으로 남아있는 몇십 년의 길에 대한 청사진이 있는 그런 나이일 줄 알았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서른, 하면 인생의 한 궤도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하는 생각이라곤 ‘회사 가기 싫다’ 뿐인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분야의 자신감이 있는 꽤 멋진 어른일 줄 알았다.

이십 대 후반의 현재의 나로서는 서른, 하면 잘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반년 뒤의, 한 달 뒤의 나를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과연 이 회사에서 그때까지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걸 다음 달의 내가 좋아할까?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를 내년의 나도 만나고 있을까. 아무것도 자신이 없기에 정처 없이 헤매기만 하는 사람이다. 내 주변 지인들은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거나, 이미 지나 보냈다. 나는 그들의 서른을 놀리기도 하고 축하해 주기도 했지만 사실 서른이라는 나이는 이젠 내게 숫자일 뿐, 더 이상 크게 분수령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경험치가 특정 수치로 차면 레벨업 창이 열리며 '당신은 드디어 이립(而立)의 나이, 서른입니다'라고 나타낸다기보다는, '뭐야- 나 지금 서른이야?'식의 아무것도 변함이 없는데 나이만 서른이 된 그런 모양새라고 느껴진다.



그래서 ‘서른’, 뭔가 이 나이에 대하여 글을 써보려니 한참을 생각나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자문해 보았다. 내가 서른이 된다면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에 대해 순간순간 고민하는 모든 게 서른이 되면 어떤 형태로 변하여 있을까. 지금 내가 하는 고민이 그때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까. 서른에 내가 현재의 직업을 버리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 떠나면 어떨까. 그때까지 나는 내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이들을 모두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많은 걸 떠나보내고 많은 걸 처음 만나게 되어 온갖 감정을 겪고 온갖 피곤함과 설렘을 느끼다 보니, 조금은 지치지만 어찌 되었든 아직은 궁금한 마음이 크다, 내 서른. 그렇지만 아무리 갸우뚱해도 나는 결국 그때가 되지 않는 한 나 자신은 누구보다 더 예측하기 힘들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서른, 하면 생각나는 드라마가 있다. 중국어를 공부하려고 넷플릭스에서 찾아본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이다. 드라마는 서른이 된 세 여성의 우정과 꿈,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는 그 세 명의 인물들을 떠올릴수록 감정이입이 되곤 한다. 그들이 인생이라는 풍파 속에서 우연한 인연들을 만나고, 우연한 역경을 만나고, 버티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걸 보며 서른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동시에, 과거에도 미래에도 열정과 의지는 변함이 없구나. 서른에도 옆에는 항상 의지할 누군가가 존재하겠구나. 서른에도 다시 무언갈 시작해도 되는구나, 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겨우’ 서른이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하자 마음의 짐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가 현재 고민하는 모든 걸 서른에도 고민해도 될 것 같다. 공자도 서른에야 기초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식 탐구와 자기 계발의 욕구가 큰 나에게 ‘서른’은 아무래도 내가 얼마나 성장을 했고 내가 얼마나 강인해져 있는가가 가장 기다려지지만, 현재의 내가 하지 못하는 생각의 깊이에 도달하는 미래의 내가 있다는 것은 어쩐지 기대가 된다. 십 대, 이십 대 초반의 내가 그렸던 멋진 이상향의 서른은 없더라도, 서른의 나는 지금처럼 고뇌하고 가끔 지치고 자주 웃으며 행복할 거다. 넘어지면 일어설 거고, 끝이 나면 시작할 거다. 

겨우 서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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