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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Jul 24. 2019

글이 쓰고 싶은데 글이 안 써져요

[사적인 일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매우 유감

이전에 썼던 '쉬운 글을 쓸 필요가 있나?'라는 글의 2편을 쓰지 않은지 꼬박 두 달이 다 되어간다. 5월에 방영한 방송을 7월이 가기 전엔 마저 리뷰하고 싶었지만 왠지 안 될 것만 같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매일, 매 순간 드는데 좀처럼 글이 쉽게 쓰이질 않는다.


다른 이유들은 없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닌 나의 오래된 악습관들 때문이다.


     1. 글 쓰기 전에 할 게 너무 많다. 공부 못하는 애들의 필통이 가장 화려하듯.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아 보려고 한다. 그럼 꼭 지저분한 내 방을 견딜 수가 없겠다. 평소엔 잘만 쓰고, 마음껏 어지르고, 그 와중에 또 잘만 잤으면서. 꼭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날에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도 용납할 수가 없다.


미루고 미루던 방청소를 시작한다. 대충 치우고 말면 그만일 텐데, 평소엔 대충대충 잘만 살면서 이럴 땐 꼼꼼함이 호텔 메이드의 뺨을 친다. 그래 놓고 청소만 하기엔 귀가 심심하다. 예능이나 틀어볼까? 보던 미드를 보면서 청소를 할까? 안 그래도 쓸데없이 꼼꼼하던 손길은 노트북에 비친 화려한 영상 때문에 느려지기까지 한다. 1시간이면 끝날 청소가 3시간이 다 되도록 계속된다.


겨우 청소를 끝내고 말끔해진 책상 앞에 앉는다. 벌써 뿌듯하다. 미루고 미루던 청소를 끝내서 뿌듯하고, 글을 쓰려고 안경까지 쓴 내 모습이 뿌듯하다. 이제 한 번 써볼까? 한글 파일을 열고 키보드를 두드리려는데, 자꾸 걸리적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얼마 전에 자른 것 같은 손톱이 벌써 자라버렸다. 평소에도 손톱이 긴 게 싫어 한 번 자를 때 바짝바짝 자르긴 하지만, 왜 그 한 번의 때가 글을 쓰기 직전이 되어야 하는지 참 의문이다. 먹는 게 다 손톱으로 가면 억울하지라도 않겠지만 착실하게 살에도 붙는 영양분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2. 머리로 먼저 글을 쓴다.


갑자기 생각나는 문구나 장면들이 있다. 그때부터 그 상상에 흠뻑 빠져들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문제는 머릿속의 상상은 기-승-전-결까지 모두 났는데 눈을 떠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좋다, 결론까지 났으니 차근차근 써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냐? 그건 또 곤란하다. 일단 머리로라도 다 썼으니 정말 다 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나 다이어트할 거야"라고 말하면 왠지 기분은 이미 다이어트를 다 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다이어트를 다짐한 날에는 동시에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할 거니까 오늘 마지막 만찬을 즐기자"며 폭식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머리로 다 썼다. 이제 쓰기만 하면 돼." 이 말이 제일 무서운 이유는, 쓰기만 하면 되는 글이니 만큼 내일의 나에게 미루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비상한 상상력과 게으른 행동력 때문에 쓰지 못한 글이 한가득이다. 아마도 이 글들을 수정 없이 쓰기만 했어도 책장 하나가 모자랄 것이다.


     3.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다시 쓴다.


아무리 내가 게으르다지만, 내가 상상해도 생각해도 너무 재밌고 당장 써야만 할 것 같은 아이디어들이 있다. 그럴 땐 하던 일들을 모두 던지고 노트북을 켜거나 늘 가지고 다니는 노트와 펜을 꺼내 무작정 쓰기에 이른다. 순조롭게 글을 시작하고 순조롭게 완성해서 퇴고까지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열심히 쓰다가도 문득, 신들린 듯 정신없이 쓰다가도 잠깐, 손가락을 멈춰지고 숨이 멎는 순간이 온다. 쌔하다. 쓰던 글을 처음부터 읽어본다.


이런. 내가 글을 쓴 건지, 싸지른 건지, 토해낸 건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의 쓰레기가 쓰였다. 재활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쓰던 글들 앞에 Enter, Enter, Enter, Enter, Enter를 치고 처음부터 다시 써본다. 두 번째 쓰는 글이라 아까보다 더 잘 써지는 것 같다. 아까 막힌 부분도 술술 넘어간다.


그렇게 또 쓰다가 멈칫. 아까보다 낫지만 여전한 쓰레기다. 재활용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 사이에 머리가 다 써버렸다. 그리고 체력도 떨어졌다. 똑같은 걸 여러 번 쓰는 행동이 매번 즐겁지도 않다. 완벽주의자라서 만족할 때까지 글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데, 포기가 너무 빨라서 문제다. 남들은 시작이 반이라지만, 나에겐 시작이 시작일 뿐이다. 그래서 끝까지 쓰지 못하고 쌓아둔 글이 많은 것이다.


     4. 쓰고 싶은 글이 너무 많다.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머리로는 10개고, 20개고,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 이 생각했다가 저 생각했다가,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마음껏 하고 싶은 것, 상상하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머리로는 누가 못할까. 생각은 누구나, 아무 때나, 아무거나 할 수 있다, 이 말이다.


이것들을 다 실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나란 사람은 한 명뿐이다.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눈 앞의 한 장면이 다이다. 양손잡이가 아니어서 한 번에 두 개의 글도 쓰지 못하고(사실 이건 양손잡이어도 안 된다, 되는 사람은... 부럽다), 아무리 노트북을 두 손으로 두들겨도 한 번에 쓸 수 있는 글은 하나다. 창을 여러 개 열어서 동시에 써보는 건 어떤가도 싶었지만, 이거 쓰다 저거 쓰다가 당연하게도 이도 저도 되지 않았기에 관뒀다. 버킷리스트는 쌓여만 가는데, 하나도 제대로 해낸 것이 없고, 버킷리스트를 쌓아가는 재미로만 살아가는 기분이다.


     5. 메모가 습관이라, 메모를 많이 쓴다. 메모'만' 많이 쓴다.


쓰고 싶은 글이 너무 많아서 생긴 습관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흔히 말하는 '영감'이라는 것은 잿더미와 같은 것이라서 그때그때 붙잡아 구체적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그대로 시간이라는 바람에 날려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생각나서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끄적. 버스나 지하철을 타다가 생각나서 항상 들고 다니는 펜과 노트를 꺼내 또 끄적끄적. 운전할 때나 손을 쓰기 귀찮을 때는 음성녹음이라도 한다. 그렇게 메모들이 많이도 쌓여있다.


하지만 메모는 MEMO일 뿐이다. 이 짤막한 글들은 결코 작품이 될 수 없다. 쌓아두면 내용이 있는 이면지에 불과하고, 방치하면 먼지도 쌓이고 색도 바랜다. 뭐든 그렇듯 글에도 타이밍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기에, 같은 사람이 같은 글을 쓰더라도 받아들이는 의미는 그때그때 다르다. 오늘 재밌게 본 책이 내일 재미없을 수도 있는데, 내가 쓰는 글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때그때 쓰고 싶은 글의 느낌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당시의 내가 최대한 끝까지 써야 메모에서 작품이 될 수 있는 건데.



이 모든 악습관들을 모두 통과한 지금의 나 같은 '나'는 다행히 오늘 쓰고 있는 이 글을 완성하고 잘 것이긴 한 모양이다. 방청소도 하고, 손톱도 자르고, 머리로 생각하던 글을 쓰고, 수정도 맘껏 하고, 웬일로 휴대폰 메모장도 정리했다. 나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히도 글을 쓴 하루였다.


이래서 글을 계속 쓰나 보다 싶다. 이 느낌 때문에. 쌓이고 쌓아둔 내 머릿속의 단어들을 어떻게든 꺼내서 언제가 됐든 문장을 만들어 결국에는 글 하나를 만들고야 마니까. 내 글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도록 하는 악습관이 아무리 많아도, 범람하는 상상력에 휩쓸리고 밀려서라도 쓰고 싶은 글을 써내고야 마니까. 이렇게 게으르고 핑계 많은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그래도 글이니까. 글이 완성된 순간의 후련함과 새롭게 쓰게 될 글에 대한 설렘이 동시에 느껴지는 지금처럼.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글을 썼다. 밑 빠진 독이라도 채워져 있을 수 있도록.

(오늘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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