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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내 INAE Aug 12. 2019

글을 쓰고만 싶었는데 글만 쓸 수가 없었다

[사적인 일기]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몹시 유감

어릴 때부터 글씨를 잘 썼다. 악필이었던 오빠와 나란히 앉아 한글 공부를 할 때면 엄마는 늘 내 글씨를 보곤 감탄하셨다.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다 글씨를 남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갈겨쓰는데 희한하게 이 집의 딸내미는 글씨를 기깔나게 잘 쓴다고. 칭찬 듣는 재미로 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글씨를 쓰기 위해 모든 글로 써댔고, 지나쳤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어제 꿨던 꿈까지 전부 글로 적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문방구에 갔다. 엄마가 소고를 사라고 준 돈으로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수첩 하나를 샀다. 엄마 용돈을 슬쩍한 첫 경험이었고,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 혼이 난 첫 경험이자, 처음으로 소설이란 것을 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래 봐야 좋아하던 아이와 나를 주인공으로 세운 흔하디 흔한 연애소설이었지만 그날 이후로 '소설'이라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소설을 쓰기 위해 상상을 하고, 상상하는 것에 살을 붙여서 나만의 거대한 머릿속 세계를 이뤄나가게 됐다. 남들보다 빨리 내가 바라는 분야와 내가 잘할 수 있고 동시에 좋아하는 것을 찾은 덕분에 친구들이 장래희망을 고르느라 바쁠 때,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고,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덤으로 그런 나를 일찍이 독려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논술 학원으로 보내져 글 솜씨를 키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알아야 했다. 일찍부터 글에 눈을 떴던 것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이렇게 너무 당연한 걸 너무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어린 내가 새삼스레 미워졌던 오늘의 일기.




집이 못 사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전혀 풍족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어린 나는 모르는 게 당연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마음 편하게 용돈 타서 생활했으니.


공부에 별로 뜻이 없었던지라 중학교 때까진 하고 싶은 대로만 살았다.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지각하지만 않는 선에서 등교를 하고, 적당히 놀 줄 아는 애들의 눈에 뜨지 않는 선에서 평범하게 놀고, 선생님의 말을 잘 듣지만 딱히 튀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 적당한 선. 그 안에서 쓰고 싶은 소설만 썼다. 아빠가 쓰지 않는 노트를 몰래 슬쩍 해 처음으로 연재소설을 써봤다. 처음으로 애정과 뚝심을 갖고 쓴 소설이어서 그런지 친구들 사이에선 고정 독자가 생기기도 했다. 어서 다음 편을 내놓으라는 친구들의 성화를 즐기면서 '아, 나 작가 해야겠다' 싶었다.


공부에 뜻이 없었다. 그런 중학생의 나를 고등학생이 된 나는 후회했다. 중학생 때는 하지 않아도 됐던 공부를 고등학생 때는 꼭 해야만 했다. 대학교는 가야 했으니까. 대학 졸업장은 따서 번듯한 사회인이 되어야 했으니까. 아니, 무엇보다도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기 위해선 어느 대학이든 국어국문과나 문예창작학과는 꼭 나와야 하는 줄 알았다. 당시의 담임선생님들이 다 그렇게들 말씀하셨다.


수업을 듣다가도 교과서 귀퉁이에 짤막하게 소설을 썼다. 노트에 필기를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반대쪽 종이에 별의별 글이 쓰였다. '이따가 집에 가면 이걸로 소설 써야지' 해맑았던 그때의 나의 당찬 포부는 그때의 야간 자율학습에 무너졌다. 야자가 끝나면 밤 10시였고,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버스로 1시간 거리였다. 집에 오자마자 교복을 벗기가 무섭게 곬아떨어지고, 방금 눈을 감았던 것 같은데 잠깐 눈을 떠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리고 눈 깜빡해보면 또 학교. 그런 일상 속에서 글은 늘 뒷전이 되곤 했다. 학교 때문만이 아니라 수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그 와중에 더 좋아하는 친구들과 야자를 째고 놀러 다니고, 그 와중에 처음 하는 연애에 혼이 쏙 빠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대학생이 되면, 국문학과 학생이 되면 마음껏 글 쓰고, 보고 싶던 책도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야지. 얼른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아니,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들처럼 열심히 살고, 열심히 글을 쓰면서 잘 살고 싶었다. 그렇게 잘 살기 위해선 내가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라던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더니 웬걸, 처음으로 알바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부모님의 용돈을 받을 수도, 받고 싶지도 않았고, 번듯하게 자립이란 것도 하고 싶어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알바를 했다. 등록금을 내고, 휴대폰 요금을 내고, 통학비를 내면 늘 통장은 텅텅 비었다.


참 신기하게도 사람이란 건 그랬다. 돈을 벌기 전엔 지불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 돈을 벌게 되니 꼭 필요해졌다. 돈이 생겨서 저절로 돈을 내게 되는 건지, 돈을 내야 해서 돈을 벌어야 하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의 인생이라니. 돈을 쓸수록, 씀씀이가 커질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주말에도, 주중에도, 학교에서도 일을 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잃었다.


가장 먼저 학점을 잃었다. 당연했다. 돈만 벌어대는 동안에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학사경고를 받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그래도 전공수업은 잘 들었으니까. 어차피 예나 지금이나 듣고 싶은 수업만 들어왔으니까. 그건 괜찮은데.


그 시간 속에서 글을 잃었다. 좋아하던 상상을 할 시간의 틈이 없었고, 상상을 하더라도 그걸 글로 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집에서 일터로 향하는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쪽잠을 자며 부족한 잠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나날들이었다. 상상은 꿈으로까지 미뤄지더니, 꿈마저도 꾸지 않고 기절하듯 잠이 드는 나날들이었다.


시간에 쫓기듯이 살았던 그 잠깐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시간은 돈이고, 돈이 곧 시간이라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돈의 액수에 비례하단 것을. '여유'는 그렇게 생긴다는 것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라고, 아주 잠시 생각했다. 바빴던 학교 생활을 잠시 멈추고 휴학을 막 시작했을 때는 말이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으로 어디 산속에 들어가서 실컷 글이나 쓰자고. 그래서 휴학을 하고도 열심히 돈을 벌었다. 주중에도, 주말에도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런다고 모아질 돈이었다면 진작에 모였을 거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미 커진 씀씀이는 쉽게 작아지지 않았고, 받은 월급으로 한 달을 살며 다음 월급을 기다리는 동안 내 몸은 그 월급에 내 한 달을 적응시켰다. 빈자리 없이 꼼꼼히도 적응시켰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문제는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그러니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계속해야 할 일이 생기고 있던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돈과 비례한다고 해도, 돈을 이렇게 많이 버는데, 아무리 많이 일하고 많이 번다고 해도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으면 이 모든 행동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것저것 여기저기서 하던 일을 정리했다. 출근시간도, 출근 날짜도 모두 달랐던 일들이라 매일매일의 시간이 뒤죽박죽하던 매일의 나를 정리하고 내게 쓰고 싶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시간을 주는 일 하나만 남겨놨다. 벌이는 반으로 줄었지만 아예 못 벌거나 글을 못 쓰는 것보단 나았다.


단 한 가지만 다짐했다. 가난하게 사는 연습을 하자고.


좋아하던 카페 커피 대신 집에 넘쳐나는 물을 마시고,

옷이 없어서 사야 할 것 같을 땐 패션 스타일링 공부를 해서 좀만 더 버텨보고,

동네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보고, 서점에 갈 땐 미안하지만 지갑은 두고 나오자.

친구들에게도 미안하지만 밥은 집에서 먹고 만나자.


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글이 쓰고 싶다며. 근데 글만 쓸 수도 없다며. 그럼 내가 좀 더 부지런해지는 수밖에 없잖아, 맞지? 돈도 필요하고, 와중에 글도 쓰고 싶고, 친구들도 만나야겠다며. 그럼 남들 24시간 살 때 똑같이 24시간을 살 게 아니라 48시간을 살 마음으로 살아야지. 안 그래?'


해야 할 것도 많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그 와중에 봐야 할 사람도 만나야 한다면 불평할 시간에 한 글자의 글을 더 쓰고, 1000원이라도 아끼고, 10분이라도 아껴야 한다.


아니, 무엇보다도 다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해야만 하는 일이 넘쳐나는 이때, 이 나이에 내 인생을 모두 바쳐서라도 하고 싶은 단 하나의 가치는 내가 쓰고 싶은 글 그 자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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